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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 13주차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보연 작성일19-05-28 22:36 조회2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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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주차 읽기반 강의는 4장의 분열분석 입문-> 4. ‘분열-분석의 첫째 정립적 임무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책은 어렵지만 강의는 참으로 재밌게 듣고 있는데 저는 이번 13주차 수업의 소유부분에서 너무나 와 닿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읽기반 후기>

 

1. 정신분석과 분열분석?

  정신분석은 위험에 빠진 자아를 구출하기 위한, 자아를 탈영토화(파괴)하는 힘에 대항하는 것이며, 고로 자아의 회복이다. 이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도입한다. 그렇다면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의 안티테제이다. 분열분석은 자아로부터의 탈주, 즉 탈영토화화는 힘을 긍정적으로 본다. 이때의 탈주를 우주적 짝짓기와 연관시켜 떠올리면 된다.

 

2. 부분대상들과 주체

  부분대상과 부분대상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 종합, 연결의 부재가 존재한다. 즉 이것들은 상호 독립적이다. 부분대상들은 서로 다른 쾌락을 느끼며 하나의 쾌락으로 환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아무리 먹방을 눈으로 보아도 내가 실제로 맛봐야 하며, 아무리 좋은 향기를 맡아도 배가 부르지 않기에 먹어야만 한다. 부분대상들은 아무런 유기성, 전체성, 통일성이 없으며 다양체로서만 존재한다. 부분대상들이 상호 독립적이라면 하나의 주체는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리비도는 연결-분리-결합 종합의 흐름으로 매번의 장에서 변환을 생성한다. 변환의 능력을 통해서 결합종합이 발생하기에 이 때 주체가 발생한다.

 

3. 기관없는 몸(CSO)의 역할

  기관없는 몸 = 반생산, 죽음, 내공 0, 본원적억압, 여백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연결종합의 결과로 욕망기계 옆에, 즉 욕망기계의 바깥에 생긴다. 기관없는 몸은 여백이기에 이 여백이 있어 우리는 다른데로 갈 수 있다. 즉 미끄러질 수 있다. 이 말은 인과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끄러질 수 있는 잠재적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며, 새로운 짝짓기가 가능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끄러져야만 짝찟기(끌어당기기) 할 수 있다. CSO는 욕망기계들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등록표면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우리를 끊임없이 코드화, 영토화하려는 힘 보다 끊임없이 열리려하는 CSO의 힘이 우선한다.

  기관없는 몸은 죽음의 모델이다. 죽음의 모델이라는 뜻은 누군가(비인칭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 말은 언제든지 돌이켜서 새롭게 할 수 있기에(가역성) 매번의 생성(짝짓기), 매번의 시간적으로 흩어지는 죽음이다. 예를 들어 니체의 신체는 죽었지만 우리는 니체이자 니체의 생산물인 책과 매번 다르게 접속한다. 그것도 각자의 절단-채취 방법으로. 따라서 짝짓기를 통해 기존의 자아를 밀쳐내서(죽음으로써) 새롭게 시작한다(계속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것이며 인물로 말할 수 없는 누군가들의 세계이다.

  하지만 CSO의 밀쳐냄을 자아의 입장에서는 본인을 괴롭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래서 회로를 닫으며 열지 않으려한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가족이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으로 이 욕망기계를 바깥이 아닌 욕망기계 안으로 밀어 넣어 욕망기계 자체가 반생산을 생산하게 만들어 버린다. 욕망기계가 생산이 아닌 죽음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4. 자본주의 시대의 불안과 자기닦달

  이렇게 욕망기계 안으로 들어온 CSO는 겪음의 무능력을 생산한다. 사건은 일상적 회로를 끊고 들어온다. 이는 기존 회로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이 자체가 CSO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 사회, 학교는 우리를 대신해 항상 문제를 해결해주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정해진 회로 안에서 케어받기만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조그만 사건에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나는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사건을 겪지 못하니 감정도 느낄 수 없고 그러니 주체도 발생하지 않는다. 바깥에 대한 공포와 나는 할 수 없다는 존재적 결핍이 커져만 간다. 그러나 욕망기계인 우리는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 욕망기계의 변환을 통해 주체가 향유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라도 감정을 느끼려한다. 예를 들면 자아를 감독하는 초자아가 그것이다. 이상적 목표를 정해놓고 달성하지 못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바깥에 대한 공포에 자신에 대한 결핍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져오며 이를 자기닦달로 해소하려 한다.

 

5. 자본주의 시대 불안의 해소방식

1) 금욕(중화): 마취제, 진통제의 방식으로 불안해소. )종교, 일 중독, 노동 등

2) 불안의 외부대상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의 아무나를 공포의 대 상으로 설정. 정확한 공포대상이 있는 것이 불안을 겪는 것보다 낫기 때문. 공포의 대상을 정하고 우리를 이 대상에 예속시키려 함. ) 미세먼지, 이주노동자 등

3) 죄있는 방식(감정의 무절제): 조금만 건드리면 다들 폭발함. 자기안의 긴장이 많기 때문에 이 긴장을 해소할 수 있을만큼의 부정적이고 강렬한 감정을 필요로 함. 욕망기계의 변환을 하지 못하지만 감정을 겪어야만 하는 존재이기에 강한 자극을 통해 이것을 느끼려함. 생명에 게 가장 큰 자극은 반생산을 생산하는 것! 즉 자극을 통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

(오늘 아침에도 민원인이 감정의 무절제로 오전 내내 업무 마비상태를 만들었네요. ㅜㅜ)

 

6. 자본주의 시대는 왜 우리가 반생산하게 만드는가? 왜 우리를 살해자로 만드나?

  모든 소유는 죽여야 가능하기 때문. 끊임없이 갖고 싶다라는 마음을 만들려면? 끊임없이 상품을 팔려면? 소유하려면 죽어야만 한다. 따라서 소유의 욕망은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광고의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자. 절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이미지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대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은 소유, 즉 타인을 죽이는 것, 사냥충동과 같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물질적으로 잘 사는데라고 반문한다면? 우리가 반생산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가장 해롭다!

  왜 ? 자신이 주인이 되는 방식이 아니다. 소유한다는 것,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 속에서는 욕망기계의 본질인 생산력은 점점 쇠퇴한다. 더 많이 소유해도 허무할 뿐. 그것은 우리의 본능이 소유가 아닌 생산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문제인 치매와 관련있다. 욕망기계의 변환이 우리의 신경회로를 새롭게 연결한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회로만 사용한다면? 더 이상 바깥세계가 필요없다. 따라서 같은 회로 안에서만 살아가며 이는 치매=자폐=고독사로 이어진다.

 

7.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바깥과의 짝짓기를 통한 생산자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생산하면 소유를 멈출 수 있다. “바깥과의 약간의 참된 관계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관계를 돌아보고 그들과 약간의 참된 관계를 맺어보기!!

 

<쓰기반 후기>

 

1. 발제자 코멘트

1) 보연: 도덕의 계보의 언어로 썼다. 들뢰즈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존재와 행위의 분리-노동과 소외로 연결시켜 더 깊이 있게 보는 게 필요함. 문제제기에서 던진 질문을 답하지 않고 있다.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성아: 두 번째 챕터가 안풀림. 개념과 자신이 일상에서 겪는 게 분리돼 있어 서걱거리며 이 지점이 숙제라 생각됨. 공부와 자신의 일상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일상의 언어는 들뢰즈를 받침삼지 못하고 있다.

3) 주영: 배운 것이 무언인지 잘 안 드러남. 이번에 접속한게 무엇인지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무능력이 여러 가지를 늘어 놓는게 아닌지 봐야한다. 펼쳐지기만 하고 모아지지 않음. 기운을 정밀하게 써야한다.

4) 미자: ‘주체는 나쁜거래->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도덕적 구조이다. 나는 왜 죽음이 싫은지 봐야 함. 죽기 싫은 마음이 어떤 전제에서 올라오는지, 죽음을 혐오하는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등 지형적 탐색이 필요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자아는 죽음을 싫어하는데 이 지점을 봐야한다.

 

2. 쓰기반 생각해볼 주제

1) 왜 자아는 성기중심일까? 자극과 관련

2) 자극은 변환의 지점이 아니다. 자극은 양적으로 밀어부친다. -> X+DX

 

3. 선생님의 깨알 홍보

  사건은 그냥 오는게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을 경험해야만 무의식이 CSO가 무엇인지 배운다. 겪지 않으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해야만 자극으로부터 벗어나기가 가능하다. 글쓰기는 중독없이 죽음의 경험이 가능한 도구이다. ? 고통이 있는 쾌락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에세이를 써야하는 거구나. (에세이 안 쓸 수도 있다는 희망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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