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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11주차 후기 1

게시물 정보

작성자 예민한코끼리 작성일19-05-14 22:09 조회4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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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차 후기 중 읽기반 후기를 먼저 올립니다.

쓰기반 후기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결핍, 소유, 경쟁, 질투......

 

  1장 존재론과 일맥상통하는 4장 분열분석(윤리학)을 시작하기 전에 근영샘은 다시 한번 안티 오이디푸스의 문제의식을 점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속을 마치 자유인 양 욕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적인 질병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이 가장 잘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나 욕망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시대다. 사이비적인 욕망 체계에서 고통 받는 원인은 오이디푸스(가족 삼각형)이다. 자본주의 핵가족의 핵심은 결핍이며, 가족을 통해서 생산되는 존재들은 결핍을 내장한 존재다. 결핍된 존재들이 서로를 채우기 위해 만나는 짝짓기의 장소가 가족이다. 결핍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들 사이에는 소유, 경쟁, 질투,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들이 그득하다. 가족은 인물적 대상들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결핍, 소유, 원한감정, 양심의 가책 등 아래 있는 힘이 인물로 출현했을 뿐이다.”

 

() 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짝짓기가 우주의 보편적 짝짓기다

 

  오늘 수업 중에서 가장 신선했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생명론과 기계론을 넘은 우주적 차원의 짝짓기 원리는 우리가 짝짓기의 전부로 알고 있던 종 내 짝짓기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수업을 통해 이 세계를 지각하는 또 다른 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짝짓기를 종적(특유한) 체계 안에서 분리된 성과 성 사이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진정한 우주적 짝짓기는 종과 종 사이에서 이루진다. 종 간 장벽을 넘어서는 게 우주적 짝짓기의 핵심이다. 꽃에게는 벌과의 짝짓기가 가장 중요하다. 생식은 잔여적인 것이다. 나무는 바람과, 인간은 산소, , , 양 등과 다양한 짝짓기를 한다. 불과 짝짓기를 하는 식물도 있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적 짝짓기는 바로 이런 짝짓기다. 종 내 짝짓기는 특유한 경우일 뿐이다.

둘째 짝짓기에서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주적 생산을 이루기 위한 임시거점일 뿐, 대상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저 사람을 통과해서 뭔가를 생산하려 하는 것일 뿐이다. 한 마디로 그놈이 다 그놈이다.”

 

욕망의 속성 ? 거인다움과 난쟁이다움

 

  욕망의 거인다움은 존재를 사회장, 미지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라는 설명에 우쭐했다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접속하는 사회장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다시 쪼그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사대에도 큰 수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회장에 접속하는 욕망의 거인다움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욕망은 인물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욕망은 바로 사회장에 투자한다. 유기체 기계인 인간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생식부터 생존까지를 결정한다. 욕망의 거인다움은 이처럼 그 사회장에 직접 투자하는 것이다. 흐름은 비규정적인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구별 가능한 규정적인 것들이 생긴다. 규정의 바깥은 모르는 세계요, 어둠의 세계다. 우리의 욕망은 늘 바깥을 필요로 한다. 바깥이 바로 사회장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자본주의)은 사회장으로 나갈 때 탈성욕화, 승화, 리비도의 병리적 퇴행 과정을 요구한다. 사회에서는 짝짓기를 하지 않아야 사회적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장에서 짝짓기만 하면 상품 생산 안 된다. 그래서 가족 안에서 탈성욕화를 배워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되고 문명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성욕을 돈으로 승화시키든지,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는 형태로 퇴행하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기분의 흥분도 증가인 성욕은 모든 곳에 다 있다. 사회적 장에서도 성욕은 계속 작동하고 있으며, 사회적 장이 실상 그것을 잘 이용하고도 있다. 성욕이 탄압, 봉쇄, 복귀를 통해서만 작동하기를 바라는 경우, 리비도는 대상으로 하는 인물과 접속에서만 의식(밝음) 속으로 들어온다. 근본적인 우주적 무의식의 흐름이 있고, 그 리비도의 흐름을 번역해서 보여주는 인물이 있는 것이다. 인물들은 점들이다. 점들에 집중하느냐 흐름들에 집중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세계와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이게 거인다움이다. 리비도 에너지를 통해 우리는 가족 안에 유예될 수도 어둠 속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램분자적인 것은 다수적이다.

 

  나 자신이 그램분자적인 사고를 너무 당연시 받아들이면서, 세계를 거칠게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수의 법칙들은 통계적이다. 개인의 질적 특성을 잃어버린 개인들의 집합은 군중이고, 군중이 하나의 일정한 방향을 가지게 되면 무리다. 하나의 방향과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는 개인이다. 이게 자본주의 인간의 기본 전제다. 개별화해서 전체화하는 것이다. 개별화될 때 전체화되고, 수의 지배가 가능하다. 자본주의의 그램분자적인 것은 언제나 다수적이다. 개인들의 집합이 하나의 방향을 가진 것이라서 소수적인 것은 이미 비개인이다.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소수가 된다는 것은 작은 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큰 집합들에 리비도가 투자될 때만 통용된다. 큰 세계 층위에서의 짝짓기이고, 그 아래 분자적 짝짓기가 있다. 리비도가 큰 집합에 투자하면서 특유의 두 성이 성립한다. 어떻게 여성과 남성의 짝짓기가 나왔을까? 리비도는 거인다움이 있어 사회장에 직접 나가 대면하게 되며 그때 큰 수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그럴 때 통계학적 성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이 출현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짝짓기의 거점은 여성과 남성 사이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 아닌가?

  큰 집합들을 무의식적 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분자적 요소들의 작동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큰 수 법칙 아래 작동하는 분자적 작동이 있다. 거인다움 밑에 욕망의 난쟁이다움이 있는 것이다. 욕망기계들은 사회기계들 속에서, 즉 큰 것들 안에서 계속 분자적 욕망기계로 꿈틀거린다. 성욕은 욕망기계와 완전한 하나다. 성을 인간을 통해서 보는 것, 인간적 성은 그램분자적 층위에서의 작동이다. 분자적 차원이 있기 때문에 그램분자적 차원도 가능하다.”

 

그램분자적 사랑은 반쪽의 사랑, 분자적 사랑은 수천 수만의 사랑

 

  청첩장에 자주 등장하는 반쪽과 반쪽이 만나 이제 드디어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문구가 떠오르면서,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 중 결핍이 참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은 곧 남성이다. 남성밖에는 없다. 남성과 관련해서 여성은 거세된 존재이다. 이것은 결핍 중심의 정의이다. 모두 남성 동성애로 볼 수도 있다. 여성도 남성으로부터 나온 결핍된 존재로 본다면. 단 하나의 성이라는 관념은 필연적으로 거세가 바탕이 된다. 남성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거세이고, 여자는 존재적으로 거세되어 태어난다. 이런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이 사랑이다. 반쪽, 분리, 분별된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승화된다고 얘기하는 방식, 이런 결핍 속의 소통으로서의 사랑은 대부분 희극이다.

  여성만의 특유한 것으로 여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더 나을 것이 없다.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된다고 설명하는 이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없어 두 성의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기 어렵다. 거세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가 중심이 되면 거세는 흡수되고 파묻힌 작은 음경이 된다. 이것은 여성의 쾌락을 허용하라는 또 다른 남근적 욕망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관념, 의인적 재현은 결핍의 이데올로기에 정초된다. 상대를 나의 결핍 때문에 원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

  분자적 무의식은 결핍을 모른다. 결핍이 없다. 여자 속에 남자만큼 남자들이 있고, 남자 속에 여자만큼 여자들이 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수천 수만을 하는 것이다. 비인간적 성이고, n개의 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짝짓기, 여성과 남성의 생식으로 국한되는 전선을 인간적 성과 비인간적 성으로, 그램분자적 층위와 분자적 층위로 바꾸고자 했다. 들뢰즈 가타리는 늘 항과 대상에 갇히게 되는 여성이 뭐야? 남성이 뭐야?’라는 질문 이전에 사랑이 뭐야? 짝짓기가 뭐야? 성욕이 뭐야?’라는 질문을 하고, 이걸 통해서 역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을 정초하고 싶은 심리 항들이 정립하고 싶은 것은 끊임없이 영토화하는 힘, 코드화하려는 힘이다. 자본주의에서 영토화와 코드화는 상대적 탈영토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 탈영토화, 기관 없는 신체를 내재화했지만, 그 끝까지 가지는 못하고 그 직전에서 돌아오게 한다. 공리계를 넘어 가지 못하게 하는 힘, 벽을 뚫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여성과 남성. 인간, 가족 등이 이걸 작동시키는 기계 역할을 한다.”

 

탈영토화하는 사랑, 영토화하는 사랑

 

  사랑은 어쨌든 전쟁인데, 탈영토화하려는 전쟁을 할 것인가, 영토화하려는 전쟁을 할 것인가? 모든 접속, 관계에서 지금 나는 어느 쪽의 전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의 틀을 가지고 오면 여성은 자기애로 출발하며, 늘 사랑받고 싶은 존재다. 그러니까 사랑해줄 타인을 찾을 수밖에 없고, 이 욕망은 대상애, 인정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남성은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존재다. 대상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성이 사랑하고 싶어 대상에 가 닿을 때 남성이 가지는 근본적 사랑의 감정은 이 대상을 통해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자신에 대한 만족이다. 그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니 실질적으로는 이 역시 자기애다. 이런 관계 속에서 여성은 사랑받고 싶은데 남 비위 맞추다 끝나 히스테리, 불만투성이가 된다. 남성은 타자를 향하는 것 같지만 자기 나르시즘으로 대상을 파괴하고, 대상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남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 대상을 인정하니까. 결국 모두 자기애, 에고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 에고를 떠받치는 것이 결핍이다. 왜 사랑하고 싶어? 왜 원해? 결핍되어 있어서 반쪽의 사랑이라서.

  들뢰즈 입장에서 사랑은 전쟁이다. 사랑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 대상을 내 식으로 영토화하려는 힘과의 싸움이다. 사랑은 생산과 과정으로, 사랑 기계는 탈영토화하고 생산하고 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짝짓기를 수단 삼아 탈영토화하는 것이 사랑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싸움이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벽을 향해 가고 벽을 통과해서 나 아닌 세계로 가는 것이다. 상대적 탈영토화는 벽까지만 가고 돌아온 탕아를 만든다. 절대적 탈영토화 관점에서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다. 성욕은 탈영토화를 드라이브 거는 힘인데, 오늘날 하는 사랑은 벽 앞에 지쳐 결국 결혼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다. 결혼은 모든 탈영토화 봉쇄된 사랑의 죽음이다. 오늘날의 사랑은 사랑의 힘으로 돌파하는 사랑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집으로, 사생활로, 에고로, 은밀한 공간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다. 은밀한 공간으로 도망쳐 숨을 고르고 다시 벽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라오게 하는 사랑이다. 결혼과 가정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랑 전쟁은 죽지 않으려는 전쟁, 영토화하겠다는 전쟁, 모든 걸 봉쇄하겠다는 전쟁이다.”

 

여성적 사랑, 남성적 사랑

 

  평소 모성애가 별로 없는 나 자신에게 나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남성호르몬이 많이 흐르는 사람인가?라고 자문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아니었네요. 제대로 여성이었네요~


  “프로이트와 달리 들뢰즈는 여성적인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사랑의 탈영토화 전쟁 자체가 여성적인 것이다. 여성은 어디에도 안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상대를 주저 앉히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남성이다. 영토화도 남성적인 것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성애도 남성적인 것이다. 들뢰즈 입장에서 본 여성되기는 모든 남성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탈출하기이다. 여성이 가정의 핵으로 변화한 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여성성이다. 하나의 기운으로 수렴하고 하나를 계속해서 만들려고 하는 남성에게는 남성되기가 없다.

  여성적 사랑은 집 없이, 소유 없이, 결핍 없이 관계 맺기이다. 존재적 결핍을 가지고 하는 모든 사랑에 반대하는 게 여성적 사랑이다. 마치 빛이 투명한 프리즘을 통과하여 많은 빛 발산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프리즘이 n개의 접속 방식을 가져서 가능한 것이다. 발산시키고 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여성이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중에서는 여성적인 것 우선이다. 여성적인 것을 통해서만 남성이 될 수 있고, 여성이 될 수 있다. 재영토화하는 힘은 언제나 출현하지만 탈영토화가 먼저다. 생성이 존재를 먼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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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일윤님의 댓글

일윤 작성일

너무 정리를 잘해주셨네요. 이정도로 정리하면 앞으로 수업 안듣고 후기만 읽어도 될듯....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