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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거리며 내 언어로 말하고, 내 발로 삶을 걷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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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10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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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쓰담쓰담 작성일19-04-29 21:51 조회32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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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기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습니다. 이번 수업은 자본주의에 대한 총 정리!라는 느낌이었습니다. 3장에서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 필연적으로 보이는 자본주의가 어떤 우연의 역사를 따라 왔는지 살펴보았는데요, 자본주의는 활기찬 듯하면서도 우울증이 넘치고, 소통 방법은 널렸지만 서로 원한감정을 느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죠. 게다가 대부분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적합한 사회라 믿어 의심치 않는 데는 자본주의 기계가 욕망 기계의 사이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알맹이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그럼 그런 자본주의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적 특징>

1. x+dx

지난 시간에도 설명을 해 주셨던 x+dx는 돈이 자본이 되는 조건이었죠. 자본주의는 단순히 모든 걸 다 돈으로 환원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xdx라는 잉여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자본이 되듯, 자신을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힘에 종속되는 게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이었습니다.

 

2. 탈코드화, 탈영토화

코드화는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고, 영토화는 자신의 정체성, 혹은 자신의 나와바리(영역)를 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체의 형성은 코드화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사회체를 붕괴시키려는 탈코드화나 탈영토화를 막으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걸 반기는 눈치였죠. 이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는 기관 없는 신체(반생산)을 욕망 기계 안으로 내부화시키면서 이루어집니다.

 

3. 기관 없는 신체의 내부화(자본주의 내재장)

전제군주 기계에서 전제군주는 사람들의 외부에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전제군주는 초코드화, 기관 없는 신체, 법과도 맥락을 같이 했는데요, 이런 외부의 전제군주가 두렵기에 사람들은 마지못해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부적 명령이 사람들에게 내면화(외삽)된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입니다. 이제는 옆에서 협박해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이 벌어진 거죠. 이는 양심의 가책, 죄의식, 죄책감으로 드러납니다. 이렇듯 권력의 목소리가 내부에서 울리는 것을 편집증이라고 합니다.

 

4. (재현의 층위)


원시 영토 기계는 기호가 구체적인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제군주 기계에 오면서 구체적인 사건이 탈락되고 기호는 기표가 되었죠. 이제는 을 말할 때 관념적인 컵이 떠오르게 된 겁니다. 이런 기표는 초월적인 존재(하늘, , )에서 부여받으며 기표는 기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기계에서는 기의가 탈락되면서 기표뿐이 떠돌아다니게 되죠. 이것들을 형상 또는 이미지라고 합니다. 형상들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기 때문에 비구상적입니다. 형상의 개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를 다시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탈코드화, 탈영토화

공리계대수적 시공간의 탄생>

자본주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는 공리계라는 시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대수적 시공간이라고 하니 괜히 좀 어려워보였지만, 사실 꽤 친숙한 개념이었습니다. 1+1=2을 납득할 수 있다면 말이죠.

 

‘x’의 탄생

x는 빈칸()을 의미합니다. x 안에는 1, 2, 3, 4, 5와 같은 질적인 수(서수)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숫자가 질적이라니 이상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생활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1시간과 2시간은 질적으로 결코 같지 않죠. 그런데 이런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수들을 ‘x’라는 곳에 같이 집어넣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수들의 질이 탈락(기수)하는 것이지요. 서수에서는 12345이 성립했습니다. 하지만 기수 체계에서는 질이 탈락되고 1, 2, 3, 4, 5는 모두 1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1이 두 개 있으면 2가 되고, 세 개 있으면 3이 되고, 네 개 있으면 4가 되고, 다섯 개가 있으면 5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든 수가 1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수는 추상량이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대수적 시공간, 즉 공리계를 형성하죠.

 

관계/배치

이제 수들 각각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수 자체가 아닌, 수들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y=x+4와 같은 함수에서 중요한 건 y가 뭐냐, x가 뭐냐, 라기보다는 =+4로 연결되는 그 둘의 관계이죠. 이런 이웃과의 관계 혹은 배치 속에서 드러나는 게 내용이고, 이것이 곧 형상입니다.

 

형상, 배치, 리듬

근영샘은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로 형상에 대해 더 설명해 주셨습니다.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둘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미디어의 접속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는 거죠. 예컨대 유행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행에 들어가고 접속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죠.

이와 더불어 내용형식과 표현형식에 대해 설명해 주셨는데, 헷갈려서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내용형식과 표현형식을 통해 형상, 배치, 리듬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형상들은 해독을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해독은 기표?기의 체계에서만 드러나고 형상 체계에서는 감각하는 게 중요했죠. 형상, 배치, 리듬이 어떤 걍약으로, 어떤 흐름으로, 어떤 속도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것을 느끼는 게 감각이고, 여기에서의 변화란 강약, 흐름, 속도의 변화이고 이게 결국 감각을 바꾼다는 것이었죠.


죽음이 곧 생성 VS 죽음을 생산

형상들로 이루어진 공리계에서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신체(CSO)를 욕망 기계 내부로 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철수샘의 후기에 등장한 그림이 너무 훌륭해서 빌려왔습니다.

 


1) 순간-순간-순간

첫 번째 그림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 기계의 옆에서 죽음 본능, 반생산을 의미했죠. 이때의 죽음이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생산으로 나아가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순간은 죽음을 맞이해 완전히 해체되고 다음 순간으로 재조합되었습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곧 완전한 소멸이자 또 다른 생성을 의미하죠.

 

2) 순간-/순간-/순간-

하지만 두 번째 그림처럼 욕망 기계 내부에 기관 없는 신체가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욕망 기계가 죽음을 생산하게 되는 겁니다. 죽음, 반생산을 생산한다니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의 죽음은 소멸되지 못하는 파괴, 생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음, 완전히 해체되지 못한 쓰레기 정도로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결국 제대로 죽지 않았다는 거죠. 파괴가 다른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순간과 순간 사이에 단절과 빈 공백이 생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더 친숙한 죽음의 모습입니다.

 

절대적 극한?상대적 극한

이와 연결되어 절대적 극한과 상대적 극한이 나옵니다. 상대적 극한이란 말 그대로 상()을 대()하고 있다, 어떤 대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는 한이라는 조건이 있고 전제가 있으며 도달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극한까지 가는데 이것저것 조건이 붙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요컨대 제대로 안 죽었다는 겁니다.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사이비 죽음이 자본주의 공리계 내부에 있다는 거죠.

반대로 절대적 극한은 무조건적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대상도 없고 전제나 목적도 없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듯 어떤 목적도 없는 극한을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를 공고히 하는 건 실험이 아니죠. 전제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완전한 소멸을 이루라는 겁니다. 재가 남지 않는 완전한 작열!

 

 

쓰기반에서는 저와 일윤스님 두 명만 발제를 했습니다. 두 명밖에 없었는데도 평소와 같은 시간에 끝났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안티의 내용을 생활에 적용하는 데서 질문이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제 발제문은 보연샘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쓰기 힘든 지점을 양심의 가책과 연결했는데, 그걸 말하는 방식이 아직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스로 한 일에 대해서도 욕망하지 않았다는 말은 욕망 기계가 늘 작동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이죠. 내용도 내용이지만 전반적으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안티에 등장하는 문제가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 문제에 사로잡혀서 정작 들뢰즈와 과타리가 어떤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하는지는 제대로 안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조급하지 말기, 흔적을 남기지 말기.

 

일윤스님께서는 스님으로서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깨달음에 대한 상에 관하여 발제문을 쓰셨습니다. 질문은 지혜샘이셨는데, 스님께서 문제 지점이라고 생각하신 깨달음의 상에 대해 더 풀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보니 결론에 등장한 스님들의 모습도 어떤 면에서 배치가 달라진 것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이미지에 사로잡힌다는 말을 하지만, 그 이미지에 대해 정확히 바라보지 않으면 그 너머에 있는 의미 없음에 대해 통찰하기도 어렵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근영샘에게 질문 세례가 있었는데요, 한창 뉴스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마약, 성 접대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지만, 그런 말 못할 짓을 한 사람들에 대해 분노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질문에, 그 사건을 도덕법칙이 아닌 물리법칙으로 바라보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어떤 배치에서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건 사람들은 다 그래라는 냉소와는 또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어떻게 욕망이 작동하는가는 면밀히 보되, 거기에 책임을 묻지는 말 것. 책임을 묻고 처벌을 한다 한들, 범죄자들은 뉘우치기는커녕 더욱 똑똑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벌이 있다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것을 초래할지 상상할 수 없는 무지 자체가 가장 큰 업보라고 하네요.

 

이렇게 읽생 2분기 수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내용은 많으나 사용하기에는 아직 버거운 느낌이네요; 다음에 읽을 4장 분열-분석 편은 가장 읽기 좋은 부분이라 하였지만 과연어떨지?!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그래도 일단 일주일은 쉬겠어!!

 

P.S. 깨봉에서 깐쇼새우와 가지 탕수를 먹고 뒤풀이로 오랑쥬 파티룸(!)으로 향했습니다. 근영샘이 챙겨 주신 몽고왕과~ 철수샘의 냉이주로 햄볶한 뒤풀이였습니다.


술테이블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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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철수님의 댓글

철수 작성일

정말 깨알같은 (출처를 반영한) 수업 후기와
안주없이 술을 마셨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두다니... 훌륭하십니다.
(그래, 일주일은 놀겠어.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