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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거리며 내 언어로 말하고, 내 발로 삶을 걷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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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8주차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중성미자 작성일19-04-17 23:36 조회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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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반>

 8주차 범위는 35.영토적 재현과 6.야만 전제군주 기계, 7.야만적 또는 제국적 재현 361페이지 까지였다. 들뢰즈와 푸코는 언어학에 대해 기표, 기의에 대해 자주 애기했는데 우리는 이런 기표, 기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기표, 기의가 나오면 거부감마저 든다. 이번 주는 원시영토사회에서의 기호, 잔혹극과 부채, 그리고 언어는 왜 중요한지를 중심으로 후기를 작성해 보겠다

   

원시영토기계에서의 기호: 기호는 사건이다

  원시영토사회의 현실계는 방계 결연을 통한 확장 혈연이다. 혈연을 확장하는데 기호가 활용된다. 혈연의 확장은 외연의 확장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나의 변종이 많아지는 것이다. 즉 잡종을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종교배가 필요하다. 이종교배라는 사건 위에 기호가 들어간다. 원시영토기계에서 사건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발생시켜서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생산하는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를 묻는게 아니라 무엇을 작동시켰나를 보는 것이다.

 

잔혹극과 부채

  원시영토기계에는 잔혹극이 나온다. 호리병박에 무언가를 정확하게 새겨넣는다. 이 새김을 통해 결연이 발생하게 된다. 새김은 아프기 때문에 고통을 잉여적으로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 눈은 읽는 눈이 아니라 보는 눈이다. 보는 눈이 즐거워하니 잔혹극이 된다. 여기서이렇듯 사건을 이해할 때 새김만을 통해 사건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까지 발생시켜야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런 고통이 필요할까.

  여기서 들뢰즈는 니체를 가지고 온다. 빼앗아 간 쪽은 훔쳐옴으로써 채무자가 되고, 빼앗긴 쪽은 채권자가 된다. 한쪽은 부채감이 생기고 다른 쪽은 상실감이 생긴다. 부채의 관계일 때 결연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 부채를 어떻게 유지시킬까. 고통이 부채를 유지시키는 힘이자 소멸하는 힘이다. 여기에서 잔혹극의 의미는 복수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가 갖는 감정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보기에 왜 저런 짓을 할까 싶기도 하고, 우리는 고통을 빨리 없애 버릴려고 하는데 원시영토기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통 자체가 양쪽 모두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게 잔혹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환이 아닌 도둑질과 선물

  이렇듯 잔혹극은 서로 다른 두 흐름의 마주침의 채취와 절단에서 일어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계약이 아니라 도둑질과 선물로 나타난다. 도둑질은 단지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흐름이 저쪽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나에서 이탈해서 어딘가로 끼워넣기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힘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폭력적인 힘이다. 이렇게 본다면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폭력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관계가 폭력이라니. 너와 관계를 맺고 싶어 이 말에는 나는 너에게 폭력을 쓰겠어 라는 말인 것인가. 이 폭력을 견딜 수 없어 나는 관계 맺기가 힘든 것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호의 3단계

 원시영토기계와 전제군주기계, 문명자본주의기계에서 내가 컵이라는 말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원시영토기계에서 이라고 하면 컵 가져와혹은 물 가져와이다. 한마디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는 사건이다. 사건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자를 향해 명령하는 것이다.

전제군주기계에서 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컵에 대한 관념을 떠올리는 것이다. 나도 하니까 머릿속에 컵이 떠올랐다. 컵의 이데아라고 할까나. 여기서 기호는 기호의 기호이다. 기호에 대한 기호이다. 이건 사건에 대한 지식이 된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앎이다. 여기서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기호가 사건을 봉인한다. 기호를 봉인함으로써 다 동일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안의 내용물은 다르지만 봉인한 봉투는 모두 동일하다. 이게 역사이다.

마지막으로 문명자본주이기계에서 하면 스타벅스나 커피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여러 가지 기표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미지는 기표의 연쇄로 나타난다. 기표와 기의가 분리된다. 기표의 독립이다. 기표들만 둥둥 떠다니는 것이다. 전부 이미지다. 실제로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봉투와 내용물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봉투 안에는 내용물이 없다.

 

언어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들뢰즈나 푸코는 왜 언어를 다룰까?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발제를 쓰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고 후기를 쓰는 것도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는 건 왜 일까? 언어에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언어는 이항, 즉 타자를 필요로 한다. 언어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작동하는 사회체제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내 안의 내면의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이다. 언어를 타자와의 관계라고 보는 면이 신선했다. 나는 내면의 독백이라고 생각한 면이 강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타자가 등장했을 때 아. 그런가 라고 갸우뚱 했다. 언어는 나 혼자 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글쓰기는 단지 표현하는게 아니라 생산이라고 해야 한다.

  언어를 고찰한다는 것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재현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언어체계는 사회적인 체계와 동형적이어서 언어를 잘 분석하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재현적 관점이 아니라 언어기계적인 관점에서 본다. 언어는 어떤 사회체를 생산하는가 이다. 언어는 언어 나름의 세계가 있고 사회체는 사회체의 세계가 있는데 둘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는 것이다. 전제군주에서 언어는 신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석을 단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에는 해석이나 의미를 찾는게 아니라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하는 것은 창안, 창조이다. 특정언어의 그물망을 통해 자기의 신체를 창안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유

 책을 읽는다는 건 기호들의 폭력을 통해 책이 우리의 무언가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꽂히는 문장이 있다. 이 꽂히는 문장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나의 일부가 빠져 나간다. 기호의 폭력이다. 폭력을 당한 나는 고통을 느낀다. 기호의 폭력으로부터 사유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럴 때 글을 써야 한다. 써야 하는데 나는 도망을 간다.--; 내가 스스로 새겨 넣는 작업을 통해 향유를 느껴야 한다. 내가 단순히 뺏기는 것이 아니라 삽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쓰기는 기호의 창출이다. 읽기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나를 주조하는 건 글쓰기이므로 고통스럽더라고 써야 한다.

 

<쓰기반>

미자샘 

홈 파인 공간이라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습이다. 미자샘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습이 어떤 것인지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일부러 안 보는 건지. 내 몸이 가지고 있는 감정선을 알아야 한다. 공간이 바뀐다고 무의식이 바뀌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서 밀려 가는 건 가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무의식은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추동해야 바뀌는 것이다. 고독의 시간에 나를 집중적으로 봐야 한다. 내 뉴런이 흘러가는 방식, 내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내가 힘을 쓰는 방식을 살펴라. 공간이 나를 바꿔줄 거야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정희샘

발제 앞 부분에 쓴 것-내 것이 침범당하는 것이 싫고, 물건을 빌려주는 것 뿐만 아니라 타인이 내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그 마음이 뭔지 봐야 한다. 이렇게 사는게 스스로에게 힘들지 않고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렇게 살면 되고 타인한테도 다른 잣대를 요구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가 어떤 회로를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봐야 한다. 소유욕이라는 강한 욕망이 뭔지 봐야 한다. 지금의 나의 상태를 빨리 바꿔야 해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인지, 해롭다면 어떤 면에서 해로운지, 이롭다면 어떤 면에서 이로운지 아~~ 구체적으로 봐야 한다.

 

순이샘

순이샘이 쓰고 싶은 건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이 상태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작동 때문이라는 것을 쓰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원시영토기계를 쓸 필요가 없었다. 원시영토기계의 부채와 오늘날의 부채는 빚이라는 말만 같을 뿐 내적 연관성이 없다. 이 둘의 공통점은 없다. 이 둘은 기표와 기표의 연결일 뿐이다. 샘은 기표체계를 떠돈다. 기표체계를 옮겨 다닌다. 샘의 글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기표체계를 돌아 다닌다. 일상에서 들어나지 않았기에 어떤 리듬을 바꿔야 하는지 몰랐는데 빚 지는 방식과 연결된 생활방식을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

 

희영샘

희영샘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문제가 있고 책의 문제의식이 있다. 이 둘을 합쳐서 결론을 낸다. 작의적이다. 비교, 평가하는 방식이다. 보고서를 쓰는 방식이다 보고서를 쓰면 안 된다. 책의 문제의식을 하나 깊게 파고 들어가 보는게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원시영토사회의 부채 하나를 깊게 들어가다 보면 그 끝에 내 삶의 어디와 맞닿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를 깊게 파고 들어가는게 필요하다.

 

  나도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욕망은 흐른다는 것이다. 희영샘 발제에도 그런 표현이 있었는데 원시영토기계에서 욕망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기입하는 것이다 정립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순환은 문명자본주의기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코드화의 핵심은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욕망기계는 흘러가는게 아니고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욕망은 어디서나 다 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돈에 대해서 우리는 돈이 상업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의 첫 출발은 교환이 아니라 초코드화와 관련 된다. 즉 돈은 전제군주기계의 지배체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때 전제군주는 돈을 벌려고 하는게 아니었다. -관리-백성(백성이라는 표현이 맞나 싶다)의 이 위계구조의 꼭대기에 있기 위해서 돈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시영토기계, 전제군주기계, 문명자본주의기계는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세가지 겹이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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