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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6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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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risa 작성일19-04-03 22:23 조회3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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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6주차 후기

박주영

  ◆ 읽기반 후기

  1) 이전 또는 억압된 것의 왜곡

  프로이트는 프레이저의 지적을 언급하며 근친상간에 대한 법적 금지로부터 우리에게 근친상간으로 몰아가는 자연적 본능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근친상간이 금지되는 것은 이것이 욕망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는 것은 법으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들뢰즈/과타리는 이러한 방식은 사람들이 마치 억압에서 억압된 것의 본성을, 금지에서 금지되는 것의 본성을 직접 결론 내릴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이를 네 번째 오류추리인 이전으로 명명했다. 오이디푸스처럼 어떤 허구적인 것을 금지하고는 사람들이 이 허구에 대해 욕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이러한 금지를 통한 욕망인식은 우리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욕망을 작동하지 않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우리는 욕망을 비도덕적이고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욕망들은 억압해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 욕망은 조금도 억압되어 있지 않고 또 억압될 필요도 없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욕망은 배치체를 생산하는 것으로, 어떤 대상을 원하는 마음이 아니다. 욕망한다는 것은 생산한다’, ‘구성한다를 의미한다. 욕망하는 것은 기존흐름을 이탈하여 새로운 배치체를 형성하는 것이기에 혁명적이다.

  2) 오이디푸스적 욕망 메커니즘

  처음 프로이트를 접했을 때 나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근친상간에 집착하나 싶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아는 것은 내 삶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다.(엄청난 오만이었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배우면서 우리가 뼛속까지 오이디푸스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너무 비슷하다.

  오이디푸스적 욕망 체계로는 욕망이 근친상간처럼 금지해야 하는 것으로 상정되기에, 이는 결국 결핍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욕망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결국 충족될 수 없다. 즉 우리는 무엇도 만족할 수가 없다. 결핍을 채우는 방식으로는 욕망을 충족할 수 없고, 계속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극적인 쾌락을 통해 욕망은 나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오이디푸스적 욕망 체계 하에서는 누구든지 마약에 빠진 재벌3세가 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조건에 놓이지 않았기에 그들을 쉽게 비판하지만, 동일한 오이디푸스적 욕망 체계를 갖고 있는 한 그들과 다르다고 볼 수 없다.

  결핍을 채우고, 금지한 것을 욕망하는 오이디푸스적 욕망 메커니즘은 현대 자본주의적 핵가족내에서 습득된다. 핵가족의 원리는 아이. 자본주의와 인간의 존재적 출발을 미성숙하고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아이로 상정한다. 아이는 사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랑받는 것, 보호받는 것부터 배우는데, 이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결핍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욕망하기(들뢰즈 방식)를 배우지 못하고 욕망기계를 정체시킨다. 아이는 결핍감을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아이가 자라면 나이가 들었을 때 바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 동안 아이는 당연히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나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그 동안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책하곤 했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오이디푸스적인 사고인지 이번에 알게 되었다.

  3) 자본주의의 특징

  모든 사회체 코드화를 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기계들은 욕망을 코드화하고,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하였다. 그리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대해 공포와 불안을 코드화한다. 탈코드화된 흐름은 사회체를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특이한 것은 탈코드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추상적 원리를 해체하지 않는 선에서 코드화되지 않은 것들은 내버려둠으로써 탈코드화를 용인한다.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시키기에 우리는 전제군주시대 등 전 근대사회 대비 자유롭다고 느끼며 상대적으로 즐겁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린 조선시대 여성들을 배우고 싶어도 서당에서 공부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연애도 못하고 집에서 정해준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들로 여기며, 여성해방이 이루어진 지금시대에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탈코드화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는다.

  4) 원시영토기계

  사회기계의 첫 번째 유형은 영토기계이다. 토지는 다양하고 나눠진 노동대상일 뿐만 아니라, 생산력들로 복귀해 생산력들을 자연적 또는 성스러운 전제로서 전유하는 충만한 몸이다. 토지는 그 위에 생산의 모든 경과가 기입되고, 노동대사들, 노동수단들, 노동력들이 등록되고, 담당자들과 생산물들이 분배되는 표면으로, 원시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토지에서 일어나고 토지에 기입된다. 이 시기에는 인물화 즉 사유화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코드화는 기관, 즉 부분기계들의 집단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원시인들은 문신, 통과의례 등 몸들에 상처를 내면서 몸들에서 작동되고 몸들에 기입되는 운동인 잔혹을 통해 같은 코드를 형성했다. 즉 부족민들은 그들의 스타일을 맞추었다.

  원시영토기계는 혈연, 결연을 직조화했다. 혈연은 전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면서 지배적인 자를 표현한다면, 결연은 규정하는 자를 표현하는데, 주어진 영토성 표면 위에서 결연들이 어떻게 혈연들과 구체적으로 구성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원시시대에는 부채(선물)를 통해 결연을 맺었다. 이 부채는 갚지 않아야 하는 빚(자본주의 시대에는 상상이 불가능하다!)이다. 빚의 상환은 절연을 의미한다. 부채로 상정되는 선물은 의 어떤 것을 타자에게 주는 것으로 증여를 통해 자아가 열리게 된다. 증여는 자본주의적 기부와 같이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탈구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나를 자아에 갇히지 않게 하는, 영토를 사유화(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내재적 시스템이다.


  ◆ 쓰기반 후기

  1) 추샘

  온전한 인물(본질을 가진 하나의 전체)에 대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아 이해에 혼동을 일으켰다. 글에서 2가지(온전한 인물이 소통을 막는다는 전제, 비소통이 인물을 생산한다)가 섞여서 나오는데 을 끝내고 를 얘기해야 한다.

온전한 인물은 소통이 필요없는 자로 그에게는 틈이 없다. 반면 다양체는 틈이 있는데, 타자와 연결접속하려면 틈이 있어야 한다. 이 틈은 결핍과는 다른 것으로, 타자와 함께 생산하기 위한 긍적적인 것이다. 수학에서도 불완전성 정리가 있는데, 이는 구멍 때문에 다른구조가 생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나를 가득채우고 틈이 없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오히려 비소통을 유발한다.

  2) 지혜샘

  글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익숙했던 쓰기 방식인 은유적·비유적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숙제인데, 이를 하는 중에 기본을 다 잃어버렸다. 일단 비문, 오타를 없애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고 씨앗문장을 내 말로 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정성을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부분이다.

  3) 주영샘

  3개 인용문이 잘 연결이 안 된다. 즉 문제의식이 각각 다른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깊이 못 들어간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서브 텍스트를 읽으며 공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2개를 모두 인용할 필요가 없다.

  4)보연샘

  논리적으로 안 쓰면 되는데, 논리적을 문제화시켰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안 하면 되는데, 문제를 들여다 보고 여기서 원인을 찾았다. 문제상황을 인식하는 것과 원인을 소급하는 것은 다르다. 원인을 찾는 것은 결핍화시키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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