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더듬거리며 내 언어로 말하고, 내 발로 삶을 걷는 법을 배운다.

읽생 철학학교 읽생 철학학교

안티 오이디푸스 3주차 후기!

게시물 정보

작성자 성아 작성일19-03-08 11:16 조회422회 댓글1건

본문



안녕하세요, 읽생 철학학교 세번째 주 후기를 맡은 성아입니다~! 이번주 읽기반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 2부의 1~4장을 읽어보았습니다. 남성, 여성, 동성애… 2부에서는 1부보다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키워드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주에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뭔가 좀 더 흥미로웠다는 반응도 있었고, 도저히 매치가 안 돼서 오히려 1부보다 어려웠다는 반응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l  읽기반


1.     결핍으로서의 욕망, 과정으로서의 욕망

먼저 2부로 들어가기 전, 근영쌤은 저번 시간에 다뤘던 결핍으로서의 욕망이라는 전제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욕망할 때, 바로 그것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니까 돈을 욕망해. 사랑이 부족해서 사랑을 욕망해. 우리 스스로에게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제 아닌가요? ㅎㅎ 결핍필요라는 말로 대체해도 의미 상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나 돈이 필요해서 돈을 욕망해, 라고 해도 여전히 <욕망 = 결핍하는 것을 획득한다>의 원리에 갇혀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적 양식 아래에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필요한 것을 만듭니다. 그 동안 무심코 사용했던 필수템(must have item)’ 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부쩍 추워진 겨울 날씨에 누군가가 춥다고 말하면, 저는 자주 요즘 같은 날씨에 롱패딩은 필수(!)”라고 대답했었는데요. 생각해보면 이렇게 무심코 필요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욕망하게 되어버리는 것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필요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우리의 신체 중에도 이른바 쓸모 있는유전자는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연을 작동하게 하는 방식은 낭비이고잉여입니다. 다만 다양한 여러 개, 그 자체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쓸모 없는 96%의 유전자 없이 작동할 수 없 듯이요.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꾸만 삶에 필요의 원리를 도입하는, 그래서 삶 자체를 결핍으로 만드는 자본의 틀에서 벗어나 욕망을 전혀 다르게 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른바 과정으로서의 욕망’! 모두 책을 읽어가면서 이 낯선 문법에 접속하고 계신가요?

 

2.     사회적 생산, 욕망적 생산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의 비교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사회체를 생산하는 사회적 생산은 기계론적(mechanical)인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과 생명은 각각 비활성적인 것과 활성적인 것으로 분리됩니다. 사회적 생산에서는 마모가 일어납니다. 마모는, 죽음의 죽음입니다. 부분대상들은 뭉치려고만 하므로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지 못하고 닳아만 갑니다.

반면, 욕망적 생산은 기계적(machinic)인 것입니다. (우리가 1부에서 읽었던 바로 그, ‘기계’!) 여기서는 물질과 생명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물질적 생명이 있고, 생명적 물질이 있습니다. 사회적 생산에서와는 달리, 욕망적 생산에서는 죽음, ‘고장이 있습니다. 기관없는 신체라는 공백이 발생하면서 밀쳐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밀쳐냄, 즉 욕망적 생산의 본원적 억압은 사회적 탄압, 오이디푸스화, 파시즘과는 구별됩니다. 틈이 있어야 우리는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밀쳐냄이 있어야 끌어당김을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기적기계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기본 원리가 어긋남이라는 말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의 차이는 전체와 다양체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전체에서는 부분대상이 먼저 존재할 수 있지만, 결국 전체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부분대상은 전체의 질서 아래에 귀속됩니다. 반면, 다양체는 어긋남을 허용합니다. 부분기계들은 평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작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3.     왜 우리는 스스로를 예속으로 이끄는가?

책의 서문에서 푸코는 이 책을 -파시스트적 삶을 위한 입문서라고 소개했습니다. 파시즘이라는 억압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예속하는 것일까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놓는 해답은 안티-오이디푸스입니다! 다른 말로, 안티-자아(ego)입니다. 자아, 즉 개인을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은 근대부터라고 합니다. 부분기계들의 수동적 종합인 인간을 하나의 유기체로, ‘자아로만 보면서 우리는 이분화된, 배타적인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여성 혹은 남성으로, 자본가 혹은 노동가로 등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족주의도 이런 배타적인 등록의 일종입니다.

근영쌤은 이번 시간에 프로이트의 가족 삼각형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요. 가족주의는 모든 것을 아동중심으로 파악하고, 모든 에너지를 에로스로 환원시킵니다. 가족 삼각형이라는 원형적 관계 아래에서 인간은 평생 아동기에 겪은 결핍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에로스 이외의 관계를 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아동으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평생 어렸을 때 상처받은 것을 보상받기 위해, 돌봄받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은 절대 건드려서 안 되는 성가족이 됩니다. 이런 양식에선, 자아라는 뭉뚱그려진 전체에선, 스펙트럼이나 흐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흐름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떻게자아로부터 탈출해 타자와 접속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책을 읽으면서 모두 고민해봐야 할 지점입니다. ㅎㅎ

 

l  쓰기반

     쓰기반에서는 저(성아)와 순이쌤, 은경쌤이 <욕망과 신체><우리는 모두 소집단이다>를 읽고 발제문을 준비해왔습니다. 저의 경우 오이디푸스화가 초래한 이중구속 상태에 빠져있던 스스로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양 극단으로 배타적인 등록을 하는 이의적인 사고 방식 아래에서 저는 스스로의 존재를 자꾸 결핍으로, 불순한 것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과정이라고 파악한 순간부터, 다시 말해 스스로에 대한 다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느끼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부분기계로 구성된 수동적 종합이므로 타자적인 것이 나를 구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타자를 적극적으로 만나야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실제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근영쌤은 저희 모두에게 글을 쓸 때 타자와 함께하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타자는 미리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산해나가는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불가능한 지점에 나를 데려갈 때만 비로소 창조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도저히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되고, 모순적이라고만 느껴지는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글을 창조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호호미님의 댓글

호호미 작성일

'왜 우리는 스스로를 예속으로 이끄는가?'
진짜 안티-오이디푸스 하고 싶게 만드는 질문이라는!!
'나'라고 믿어온 것이 타자적인 흐름으로 이루어진 욕망기계라니,
들뢰즈 가타리의 말은 읽을수록 신박한 것 같아요. ㅎㅎ

수업시간을 생생하게 채취-절단한 후기 굿굿! 고마워용~ ㅎ_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