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영원회귀-그게 삶이었던가? 자! 그럼 다시 한 번!!
짜라 2부에서, ‘과거’의 시간에 대해 의지는 무력함을 느낍니다. 의지는 오로지 미래를 지향하기에, 고착된 과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의지는 과거에 대해 원한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의지는 과거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원한감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여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짜라는 3부에서 이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나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다른 어떤 길도 없습니다. 과거의 어느 순간을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고,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다른 길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원했고, 원하며, 또다시 원할 것입니다.’ 어떠한 감정의 잉여도 남기지 않는 방식만이 과거를 진정으로 죽은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업장소멸이 된다면 과거는 더 이상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과거는 죽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입구의 이름은 ‘순간’입니다. ‘순간’의 뒤로 영원으로 난 기나긴 오솔길이 있고, 바깥으로도 다른 영원이 있습니다. 이 두 길은 ‘순간’에서 서로 충돌하며 모순됩니다. 과거는 ‘순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고(지속하려 하고) 미래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지속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를 죽였다면 이제 그 둘은 충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순간(현재)’만이 있으며 현재는 미래를 당겨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현재에서 미래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이 갈라지게 됩니다. 즉 이 순간 안에 ‘전생, 이생, 내생’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을 온전히 살아 냄으로써 과거를 죽은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죽음!!! 니체에게는 ‘죽을 수 있는가! 완벽하게 소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성/삶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속이 아니라 죽음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속은 생성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니체가 심연에서 본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생성의 심연에는 죽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루신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완벽하게 죽는 것만이 '생성'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루쉰의 투쟁은 지난 시대와 함께 완전히 몰락하는 것이었다고 하셨는데요. 자기극복, 위버멘쉬가 되는 것은 죽음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인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영원성은 지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성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는데요. 끊김, 그것이 바로 죽음이겠지요? 그래야 생성의 시간을 열 수 있겠지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생성의 긍정은 죽음의 긍정, 그렇지 못하면 지속일 뿐~
죽을 용기가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야겠습니다. 그런데 남김없이 소멸하고 싶은가? 물으면 아직은...
영원회귀, 그것이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게 삶이었던가? 자! 그럼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기분과 새로운 힘, 용기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