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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절도경합 작성일18-05-13 11:48 조회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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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일요일, 탁한 신체로 후기를 쓴것 같아 다시 후기를 올립니다.

 

강자는 병자를 낫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잘난자들을, 승리하는자들을 증오하는 병자의 특성 때문일까? 자기를 낫게 해주겠다는데도 강자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지금 괴로운데도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어리석음. 여기에 치료자로 나서는 것은 병든 사제이다. 이들은 병자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병을 더 깊게 만든다. 그렇다면 병자들은 헤어날 길 없이 더더욱 깊은 병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나는 교회를 안다니니까 더 병이 더 깊어지지는 않겠지. 그러나 내가 나의 사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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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꼭 신음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금발의 맹수에게 고통은 쾌락으로 이르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통을 마주치는 지점에서의 태도가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치유하는 것, 기억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보기에는 고통에 대한 능력, 망각에 대한 능력이 능력이다. 우리는 고통을 대하는 기예가 부족해 고통을 겪어내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받는 자는 반드시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내가 화살을 맞았으면 그 화살을 다시 뽑아 누군가에게 되돌려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나만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화살을 맞았으면 화살을 뽑고 치료를 해야 하는데, 고통에 대한 상상을 키우느라 나의 상처는 뒷전이다. 또한 고통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전염시킬 대상을 찾아 감정을 내뱉는다. 이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잊는다. 고통에 대한 상상을 멈추고 고통을 통과해 나가야 한다.

 

타자에 대한 원한감정, 증오를 그 대상에 표출할 힘이 없어서 그것을 자신의 내부로 돌린다. 여기서 자기분열이 일어나고 자의식이 생긴다. 그렇게 한 나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나라는 2개의 나가 생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병자와 사제가 만날 때 금욕주의적 이상이 나타난다.

증오는 외부로 향하는 힘이 있고, 경멸은 외부와 거리를 두기 위해 내부로 힘을 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제는 이 경멸을 자신과 병자를 외부에 있는 강자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 이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원한감정의 병자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원한감정을 각자의 내부로 돌린다. 즉 죄의식, 죄책감을 심어준다.

이러한 죄의식에 빠진 고통스러운 자는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감정을 풀기 위해서, 그 감정을 더 강렬히 내뿜기 위해서 철저하게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이로써 그러한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생리적인 문제라는 것은 더더욱 가려진다. 고통의 원인은 자신의 교감 신경에의 병, 담즙의 지나친 분비(개인적으로는 나는 이것이 문제인 듯 하다. 사주에 목이 하나도 없기도 하고, 말을 잘 못하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 듯 하고), 혈액 속의 유황산칼리, 인산칼리의 과다, 하복부의 압박 상태에 의해서이다.

고통의 원인이 자기 신체의 문제인데 왜 밖에서 고통의 원인을 꼭 찾고 싶은데? 그걸 알아서 어떻게 할건데? 그래서 결국 니가 뭘 원하고 있는 거니? 하고 니체가 묻고 있는 거죠.“

이러한 죄의식에 빠지면 현재를 부정하고, 자기비하를 하게 된다. 존재에 대한 부정, 이것이 죄의식이고 원죄이다. 나는 처음부터 글러먹은 존재라는. 그래서 계속 자기를 부정해야하는 매커니즘이 생긴다. 근대는 이 죄의식과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다. 진보라는 패러다임 또한 현재를 과거화 시키고 부정한다. 근대와 진보는 같이 등장했다.

 

계몽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하셨다. 결국은 자기가 걸어가야 한다.”

 

“7살짜리 모아놓고 거기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 이것이 강자의 방식은 아니지 않는가.”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종교(의미를 부여해줌)와 다른 앎의 태도로써의 과학(무의미)은 니체는 인정을 한다. 하지만 이 과학이 자연 법칙이라는 인과론으로 넘어가는 것(형이상학으로)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뉴턴역학, 양자역학, 파동은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일 뿐이다.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이 유일한 관점이 아니라는 것에 서운해 한다.

 

삶에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장점이자 그 한계임은 알아야 한다. 사제가 모든 것을 다해주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사제를 그렇게 믿는 순간, 사제가 나를 위버멘쉬로 만들어준다 라고 믿는다는 것은, 나는 옥상에서 떨어져도 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 이다. 사제를 대하는 것에도 용량과 용법이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다. 더불어 니체도 용량과 용법에 맞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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