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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내 사유의 한계를 탐험하는 한편의 추리소설이자 SF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탐험하고 돌파하기! 글쓰기 강학원에서는 읽기와 쓰기의 초식을 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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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후기(1차)_그럴수도

게시물 정보

작성자 그럴수도 작성일17-03-10 00:48 조회30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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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후기(1)

2017.3.9.

빛의 속도(300,000km/s)로 후기를 올려주신 무풍님께서 각 조별 질문에 대해 워낙 정리를 잘 해 주시고, 유용한 관련 자료까지 올려주신 덕분에 아주 편한 마음으로 별 쓸데없고 소소한 감상 위주로 후기를 적어보았습니다.

1. 허무함 또는 먼지 같은 존재의 가벼움.

이런 광활한 우주에서, 이렇게 사소한 인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뭘 해야 하나? 무한한 우주, 티끌 같은 지구, 창백한 푸른 점, 그 점 위의 74억 인간, 우리 존재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인데. 이토록 미미하고 사소한 것일 뿐인데.

코스모스를 읽는 동안 허무함을 느꼈다는 분도 있었고, 오히려 먼지 같은 존재의 편안함을 경험했다는 분도 있었다. 평소 너무도 당연하게 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각해오다가, 책을 읽는 동안 우주적 차원에서 지구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상상해 보게 된 것은 분명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었다. 토론 시간 내내 먼지 같은 존재, 티끌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것을 보면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붙임. 배경음악 먼지가 되어’)

먼지의 정신승리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step1.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하찮고 미미한 것이었다니! 모든 것이 의미 없다.

step2. 참 별것도 아닌데, 인간이랍시고 온갖 잘난 척은 다하고 살았네.

step3. 사실, 그렇게 심각할 것도 없고 편하기도 하다. 존재는 원래 가벼운 것이니.

step4. 이렇게 거대하고 무한한 우주 속의 먼지라니.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하다.

다른 측면에서 이런 광활한 우주와 어마어마하게 미미한 인간과의 관계를 하나의 생물체를 구성하는 100조개의 세포와 대비해서 생각해 본다면,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우주라고 부르는 이것의 밖에는 수많은 우주들이 존재하고 이것들 역시 무엇를 구성하는 100조개의 세포 같은 것이라면?

2. 우주적 관점, 우주적 시선.

왜 나는 우주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까?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매우 공감하면서, 조금 착잡하기도 하고,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순수했던(혹은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어린 시절에도 밤하늘을 보며 감동을 받거나, 우주 그 너머 미지의 공간을 상상하던 경험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 인생, 가족, 내가 속한 조직, 사회, 국가 따위에 대해 고민하기에도 벅찬데, 상상을 벗어난 속도로만 측정 가능하다는 멀고 먼 우주의 일이라니. 나와는 다르게 아주 어려서부터 지구 밖의 무엇에 대해 궁금해 하고, 별자리를 외우고, 미확인 비행물체 존재 여부에 사활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외계의 지적 존재와의 교신을 위해서라면 천문학적인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기도 한다.

모태 세속인이자 모태 속물인 나에게는 없는 그것, 우주적 시선.

나에게는 아주 잠깐 책을 통해 경험하는 우주조차 이렇게 생경한데, 평생을 지구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우주적 규모로 세상을 바라보는 천문학자들은 어떤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볼까? 직업병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오랜 동안 별을 연구하고 광속 단위로 우주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지구 위의 일상과 세속의 생활을 대할 때 보통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칼 세이건의 시선을 빌려보면, 지구로부터 가장 먼 곳을 바라보는 그가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지구와 인류, 미래 후손에 대해 더 깊은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는 것 같다.

3. 우주의 원리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

서양에서 우주적 원리를 대하는 방법은 근거 있는 가설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반면에, 주역과 같은 동양 철학에서는 이미 우주의 원리 만들어 놓고(또는 밝히고), 그에 맞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양에서는 왜 증명하려 하지 않았을까?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감이당에서 처음 배웠던 수업이 명리학의 기초였다. 초보의 입문 수준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명리학의 해석력은 언제나 놀라웠다. 그런 감탄은 아마도 그 작동원리(우주의 기운을 접하는 첫 호흡과 운명의 관계)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증명 불가능성이 명리학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서구식 과학적 접근 방법은 이론과 공식에 의해 원인과 결과의 과정이 명백히 드러난다.(다만, 내가 이해를 못한 것일 뿐이다.) 서구의 과학에서는 그 과정을 알아내는 것이 진리를 밝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진리를 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탐구정신, 유려한 말빨과 글빨로 나타나는 표현력, 수백편의 논문과 저술 성과, 재단을 만들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조직력, 심지어 전설의 사랑꾼이라 불리는 연애 능력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이 모든 것을 가졌던 칼 세이건의 사주가 무엇인지가 정말 궁금해졌다.

4. 우리는 과학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과학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과학에서 창조적 사고란 바로 이런 것이다. - 다시 말해 사실에 대한 기계적 수집이나 이론의 귀납이 아니라 직관과 편견,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 빌려 온 통찰력을 포괄하는 복잡한 과정인 것이다. - 스티븐 제이굴드. 다윈 이후

과거 명나라의 정화는 서양보다 앞서서 더 뛰어난 기술을 통해 세계를 탐험했지만 동양에서의 탐험은 그 대상을 대하는 방법과 그로 인한 결과에 있어서 서구적 탐험과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기술의 발전을 향유하고 활용한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기술적 결과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윤리는 함께 간다. 탐험-약탈-욕망 충족-약탈 구조 재생산이라는 서구의 기술 과학의 발전 과정 역시 어떤가치관과 윤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과학의 냉철한 이성, 객관적 증거, 논리적 판단에 대해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배타적이며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과학은 관계망을 절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촘촘한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세계의 일부를 드러내서 실험하고, 분석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착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과학을 윤리나 도덕적 가치판단이 제거된 이성과 객관성의 논리로만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과학을 면역력이 결핍된 어린아이상태에 머물게 한 것은 아닐까? 과학에 대해서도 가치판단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과학이 어떻게 구현된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 지금의 기술 발전과 과학의 진보하는 방향은 나의 가치관과 부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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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까망닭님의 댓글

까망닭 작성일

경쾌한 선율에 정말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요~~^^
과학과는 상관없을 것 같던 직관의 영역이 과학의 발전을 촉발하는 기제였다는
것에 다시한번 놀라며... 과학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