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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열하일기 강학 후기 - 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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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은주 작성일19-05-31 10:34 조회33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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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강학 후기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象氣)>에 대하여

*) 북드라망 책에 象氣라고 되어 있고 돌배게 책에는 象記라고 되어 있다.

그 몸체를 생각해 보면 소의 몸뚱이에 나귀의 꼬리, 낙타의 무릎에 호랑이의 발, 짧은 털, 회색 빛깔, 어진 모습, 슬픈 소리를 가졌다. 귀는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 같으며, 두 개의 어금니 크기는 두 아름이나 되고 키는 1(, 3.03M) 남짓이나 되었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자벌레처럼 구부렸다 폈다 하며 굼벵이처럼 구부러지기도 한다. 코끝은 누에의 끝 부분처럼 생겼는데 거기에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서 둘둘 말아 입에 집어넣는다.

<열하일기 하권> 330페이지, 박지원 지음,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옮김, 북드라망, 2018

연암이 살던 18세기 조선 후기에는 글을 아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코끼리를 알았다. 그런데 조선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아는가? 글을 통해 안다. 코끼리 상()은 코끼리를 본 따 만든 상형문자이므로 글자를 통해 상상한다. 이런 저런 글에서 묘사되어 있는 코끼리 모습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코끼리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연암이 열하에서 살아움직이는 코끼리()를 보고 묘사한 내용을 보면, 연암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코끼리의 부분부분을 설명하고 있을 알 수 있다. 코끼리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암의 묘사를 읽으면서 정확한 코끼리의 형상(形像)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를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는 소, 낙타, 호랑이, 자벌레, 누에가 떠오를 뿐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말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 봉황, 주작과는 달리, 코끼리()는 분명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연암처럼 코끼리의 부분 형상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코끼리의 실제 모습은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치()도 코끼리와 똑같다. 분명 이치는 세상에, 우주에 촘촘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코끼리를 설명할 때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부분부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부분부분의 설명을 듣고는 무릎을 치며 맞다 맞어. 그렇구말구!”라고 맞장구 친다. 하지만 아직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치는 부분1 + 부분2 + …. + 부분n”으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부분1 + 부분2 + …. + 부분n” 이치가 아니다.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은 코를 보고도, 코가 그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코를 부리라고 착각하고는 했다. 왜 인가? 코끼리는 다리가 길고 목이 짧으니 고개를 숙여 땅위의 풀을 뜯어먹을 수 없다. 코끼리가 무릎을 꿇고 주둥이를 땅에 댄다고 해도 입천장에서 길게 뻗어나온 어금니 때문에 풀을 뜯어먹을 수 없다. 그러니 학처럼 긴 부리로 풀을 뜯어먹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왜 발생하는가? 사람은 이치()를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보고 파악할 수밖에 없고,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의 경험 위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체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한, 오류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오류를 막고 제대로 이치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강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언덕을 가리키며 말한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중략>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열하일기 상권> 48페이지, 박지원 지음,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옮김, 북드라망, 2018

연암은 온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는 내가 서있는 이 언덕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순간에 맞닿을 수 있다고 한다. 이치를 파악하고 싶다면, 강 건너 저 편 언덕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자신이 가는 길이 최단 경로일 수도 있고, 우회하는 길일 수도 있고, 막다른 길일 수도 있고, 강 건너 저편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이어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일단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 길이기도 하다.

길을 가다보면 타자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타자들과 만나는 순간, 마법처럼 나의 존재는 변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 속에 길 위의 있는 나는 한 번도 같은 존재인 적이 없다. 매 순간의 나는 다 다른 존재였다. 지금의 나, 1년 전의 나, 5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나는 똑같은 존재일 수 없다. 오늘만 봐도, 하나의 주제에 대해 학우들은 모두 다른 생각들을 펼쳤다. 학우들의 생각에 접속할 때마다 나의 존재는 조금이라도 변하게 되니 오늘 아침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글자수 : 1814

원고지 : 12.65

#연암의사유는깊다 #어려웠다 #여러번읽고나서야조금이해가되었다 #글후반에도강록을넣으니글구성이안맞다 #다음에는연암의사이철학에대해쓰고싶다 #빠른시일내에꼭 #이해도가낮지만마음을다해써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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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은주님의 댓글

서은주 작성일

열하일기를 읽어보셨다면, 코끼리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어떨까요? 서로의 공부에 도움이 될뿐만아니라 생각공유로 생각의 파이(pie)를 키울 수 있어요.

문영님의 댓글

문영 작성일

전 하늘은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마치 맷돌이 보리를 갈때 크거나 작거나 가늘거나 굵거나...그냥 가는 작용만 있을 뿐인 것처럼. 하늘조차 모양(天), 성정(乾), 주재함(帝), 오묘한 작용(神)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하나의 법칙을 찾으려고 하죠. 닭의 부리가 어떻고 학의 다리가 어떻고...그런데 코끼리를 보면 그게 들어맞던가?? 하늘의 섭리, 의도, 고정된 진리는 없다는 연암의 일침!!
 
또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글자로 코끼리 상象을 쓰잖아요. 이 글자를 옆으로 눕히면 코끼리 모양이 된다네요^^ 주역의 상전이라는 것도 괘상을 보면서 이리저리 궁리한 거잖아요. 옛날 사람들 눈에도 코끼리가 참 희한하게 생겼던 거죠. 코끼리를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만져보고 따져보듯이 그때그때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달하지는 이치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라는 뜻??인가요???^^

서은주님의 댓글

서은주 댓글의 댓글 작성일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 太極圖說≫, 주자의 이기론... 이치에는 의도가 없다는 심오해서 그 뜻을 잘 전달할 자신이 없어서, 빼버렸어요. 그랬더니 자꾸만 생각이 나네요. 좀 더 공부해서 다시 써봐야 보고 싶어요.

문영샘의 댓글이 제 마음에 하나의 파장을 일으켜주니, 매우 기쁩니다. 太好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