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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 나의 삶 나의 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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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쓰담쓰담 작성일17-11-12 15:31 조회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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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책 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책이 많이 어렵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막상 들어보니 정말 너무 어려웠다! 그 영향인지 이번 주 토론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토론 간간이 근영 샘이 설명을 해 주셔서 그나마 이해한 것 같다. 하지만 워낙 개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모두 이렇게 보내기는 아까운 책이라고는 했다. 다음 기회는 에세이에서?!


 이인 샘은 기호체제에 삘이 꽂혀서 그것을 중심으로 발제를 썼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주체화적 체제등등 그림으로는 그려져 있지만 대체 왜 그렇게 그렸는지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다.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도표참조) 여러 개념들이 존재하지만 필자가 의도했던 내용은 결국 현실과 이상은 똑같은 배치의 양면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현실과 이상은 정 반대항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 같은 기호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이다. 현실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 이상은 주체화적 체제로 형성되었다. 여기서의 기호는 추상적인 개념을 뜻하는 기의와 그 개념을 담아내는 기표의 연결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대답(기의)는 원래 없다”(앞과 같은 책, p.90)는 것! 대학생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학교-수능-대학-취업-결혼이라는 기표들의 연쇄고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은 그 현실을 바탕으로 주체를 세울 때 생성된다. 기표의 연쇄고리 위에 놓인 라는 존재. 그 주체는 아무리 현실을 벗어나 이상을 세운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같은 기호체제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 누구인지 묻는 것도 어찌 보면 동어반복이다. 이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두 일반적인 세상의 기호체제속에서 언어를 습득한, ‘기호체제를 내면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가 여태껏 배운 단어로 자신을 설명한다는 건 기호체제안에 머무른 대답일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떡하지?

 “그런데 이렇게 도표(기호체제의 도표)를 그려 놓고 보니, 이 도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선을 그어 보고 싶어진다.”(앞과 같은 책, p.100) 일단 그 도표를 그려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나갈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결론! 이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건가, 싶지만 실제로 스스로가 각자의 의식에 새겨진 기호체제부터 바꿔야 하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도주선은 내 일상, 내 경험에서 나온다고!

 왜 하필이면 내 일상일까? 우리는 평소에 일상을 너무 당연해서 있는 줄도 모르거나 때로는 권태롭게 느끼는 데도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의식, 사회법칙, 나를 치장하는 물건들을 모두 내려놓(말은 쉽다) 남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욕망은 내게 없는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결핍상태와 아무 상관없다.”(앞과 같은 책, p.107) 일상에서 우리들의 욕망은 흐른다.’ 하지만 석영 샘이 질문했듯, ‘흐른다는 건 무슨 뜻인지?

 발제를 할 때만 해도 욕망이 수시로 변화한다는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일상을 보낼 때 이것저것 생각하며 모든 행동을 하진 않는다. 밥을 먹는 것도, 길을 걷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기에는 밥에 들어있는 콩은 피하면서 밥알을 들어 올린다거나, 발을 35° 안쪽으로 회전시켜 걷고 싶다는 욕망이 다 숨어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디테일한 욕망 하나하나에 얽매이진 않는다. 물론 신경과민증 환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조금 다르게 먹고, 조금 다르게 걷는 것도 쉽게 받아들인다. 결국에 먹고 걷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항들을 고정화시켜 다른 것을 욕망하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욕망의 흐름이 멈춰버리는 게 아닐까? 책에서는 이를 암세포가 다른 세포들을 먹어 치워 버리는 것처럼, 이 신체는 여러 욕망들을 단 하나의 욕망으로 흡수해 버린다고 표현한다.

 그러니 욕망을 흐르게 해서 몸을 충만하게 한다는 건, 이제껏 욕망해 보지 않은 다른 욕망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생명의 기본적인 벡터라고 근영 샘은 설명하셨다. 아주 오래 전에 무성생식으로만 스스로를 복제하던 최초의 생명체가 유전이라는 유성생식으로의 진화를 거쳤듯. 그러니 유전에서의 핵심은 부모와 닮았다는 게 아니라 부모와 닮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양성에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생명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잘 흐르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 욕망이나 기호체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타자(내가 아닌 존재)에게 있다. 그래서 변화란 타자와의 접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게서 벗어나는 것과 타자와 접속하는 것은 동시에 발생한다. 이런 탈지층화의 작용을 막는 반작용의 예가 바로 얼굴성이다. 얼굴은 일종의 기호체제다. 사람은 타인의 얼굴에서 감정과 심리를 읽어낸다. 이때 얼굴 그대로의 신체성은 사라진다. 따라서 얼굴은 모든 의미화된 사물에도 존재한다. 기념주화, 연예인이 쓰던 물건, 유명 인사의 국적,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얼굴에 포함되지 않는 나머지는 모두 풍경이 된다. 풍경은 환경과는 다르다. 환경은 수많은 개체군들이 우글거리는 서식지이자 다양체”(앞과 같은 책, p.125)이지만 풍경은 얼굴의 반대항, 얼굴을 돋보이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사람의 얼굴은 특히 그 특정 얼굴을 갖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의식을 심어 준다. 따라서 이 얼굴만으로는 그 사람의 신체성에 가 닿을 수 없다. 얼굴이 접속을 막는 막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다.


 어쩌다 보니 개념을 나열하는 지루한 후기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위와 같은 개념들 이외에도 국가장치와 전쟁기계’,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파시즘과 미시정치등 어려운 개념은 더 많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모든 개념을 빌려 말하는 건 동일하다.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달아나라고.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공허한 말이 있을까!(/ㅁ\) 결국 그 하나하나를 몸소 실천해 보는 것은 각자의 구체적인 상황에서이다. 그러니 스스로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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