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강학원

본문 바로가기
남산강학원을 즐겨찾기에 추가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아는 만큼 살고, 아는 대로 산다! 공부가 밥이 되고, 우정이 되고, 삶이 되는 향연! 즐거운 배움의 향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신서유기 신서유기

<몸과 인문학> 후기 (방탈 1주차)

게시물 정보

작성자 윤하 작성일17-10-16 15:44 조회90회 댓글0건

본문


방황탈출, 첫 주에는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산발적으로, 분리된 칼럼 하나 하나씩 읽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칼럼과 접속할 수 없다면, 책 한 권이 중심에 놓고 있는 전제 혹은 책의 흐름을 관통하는 줄기를 자기 나름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 번 읽어야합니다ㅎㅎ)

그리고, 전체 흐름을 읽을 때 자꾸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는 책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번 저의 발제처럼 말이죠;;)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책을 통해 구체화시키는 게 아니라 이 책이 아니라면 보지 못했을 것을 보게 되는 것,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책을 만나는 것입니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책을 ‘열심히’ 읽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충 읽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한 상태로 (즉 정신줄을 잡은 청심한 상태로) 책을 읽어야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욕심이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이라는 것은 그게 어떤 것이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아가 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몸이 있는 곳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이죠.

책의 다른 부분에서 ‘욕망과 능력의 일치!’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무척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욕망은 항상 제 능력보다 더 앞서나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딱히 문제될 것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앞서나가는 욕망에는 그 욕망을 따라서 열심히 하려고하는 마음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아니면 욕망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비관하게 되거나요. (저는 보통 자기연민으로 가는 이 후자의 경우에 가깝습니다만..;;) 이런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 욕망을 곧 욕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따라가”(199)는 것이 청심한 상태라면, 이런 연유에서,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데려오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함께하려면,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인) ‘열심히’하려는 마음을 써서는 불가능합니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서는 이런 ‘부질없는 욕심’을 떨쳐내면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책이든, 사람이든)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욕심은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욕심은 실제 상황과 다른 ‘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으려면 매순간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 안에 마음이 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마음을 쓸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해야 할 텐데, 그 조건은 아마도 간절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 읽는 이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간절히 알고자 한다면 마음이 책 앞에 있는 몸에 갈 테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알 듯 말 듯합니다.(ㅠㅠ)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