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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 수련 후기] 1학기 - 6주차 / 알라바까&승리&성자의 경 / 한결

게시물 정보

작성자 끈끈이대나물 작성일21-04-07 17:31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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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탐에서 공부하는 한결입니다.

 

이번 1학기 정견수련 6주차 수업에서는 숫타니파타

알라바까의 경, 승리의 경, 성자의 경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오늘 수업의 배움을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

 

 

 

저는 그중 알라바까의 경으로 인연담을 풀어보았는데요

알라바까의 경에서의 한 구절이 매우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시험(?)하려고, 야차 알라바까는 과거에 자신의 부모님이 과거불 깟싸빠 부처님으로부터들은 말씀을, 지금의 부처가 알고 있는지 질문합니다. 그 중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야차 알라바까] “사람은 (...) 어떻게 친교를 맺습니까?”

[부처님] “(...) 보시함으로써 친교를 맺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동안 저는 제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은 애초에 친구가 아니긴 합니다만...)

그런 줄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나의 취향을 공감해줄 사람, 나의 감정을 공감해줄 사람,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 나에게 재미를 주는 사람, 배울 점이 많아서 같이 있으면 내가 뭔가를 많이 배울 수 있는 사람...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관계를 맺어왔더군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친교란 보시함으로써 맺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 내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보시를 하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발제는,

<알라바까의 경> 인연담이 셋팅해 놓은 식인 제의라는 사건의 큰 틀을 날려버리고,

알라바까의 분노, 그리고 친교에 대한 게송과 같은 지엽적인 내용에 너무 쏠려서,

논리적으로 비약이 많은 글이 되었습니다.

 

 

 

*****

 

 

 

저는 어쩌다가 경의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을까요?

근영샘의 피드백을 생각하며, <알라바까의 경>을 다시 찬찬히 따라가 보았습니다.

 

알라바까의 첫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까?

참으로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입니까?”

 

,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야차 알라바까는

“(...) 내세에 유익한 가르침을 받았음을

(...) 크나큰 과보가 있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저는 오늘 분명히 알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 야차 알라바까가 이 경을 통해 배운 것이자,

부처님께서 이 경을 통해 설하고자 하신 것은

결국 이 세상을 잘 살고, 좋은 내세를 받는 것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차의 질문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하면 지금 생을 잘 살고, 다음 생도 잘 살 수 있냐?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런 정서와 잘 어울리는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내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제사도 지내고 굿도 합니다. 즉 제의를 하지요.

 

그리고 <알라바까의 경>의 인연담의 모든 것이 발생하게 된 핵심적인 사건은 야차 알라바까의 식인 사건이었습니다. 사건도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면 이 생과 내세에서 잘 살수 있어~”라고 한신 말씀을 듣고, 야차가 제물로 받았던 왕자를 돌려주면서 해결되고요.

 

그렇다면, 식인귀 야차 알라바까는

불행한 일로부터 나를 치켜주고, 이 생과 다음 생에서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해졌던 식인 제의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

 

 

 

근영샘께선, 알라바까의 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명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최상의 삶이냐는 질문에, “지혜로운 삶이 최상의 삶이라고 답한 부분들 통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지혜는 어떻게 생기냐는 것인데요.

숫타니파타에는 이 부분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달려있습니다.

 

믿음이 확립되고,

믿음이 확립되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섬기게 되고,

섬기면 듣게 되고,

듣게 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새김이 생겨나고,

새김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면 의욕이 생겨나게 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어 보게 됩니다.

                                                               (1757번 주석, 505)

 

 

, 지혜의 시작은 믿음인 것인데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반대로, 우리는 어떨 때 의혹과 의심을 갖나요?

 

만일, 내가 어떤 상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비교하느라 내가 만나고 있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럴 때 의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비교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면, 곧 내 마음을 온전히 주면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줄 때,

마음을 주는 그 상대를 쟤는 좀 이상하지만, 마음을 온전히 줘보겠어라고 하진 않죠.

누군가의 긍정적인 모습이나 어떤 힘을 보게 될 때, 그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부처로 볼 때, 그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줄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죠.

 

누군가를 부처로 보고 있다면 당연히 그를 존중하게 될 겁니다.

누군가를 존중하게 되면 그 사람 옆에서 살아가는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고 싶어지겠죠? 이 마음이 곧 섬기는 마음일 겁니다.

이렇게 마음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지혜에 까지 도달하는 것이죠.

이처럼 누군가를 부처로 볼 때,

그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게 되고, 믿게 되고, 배움이 일어나고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저도 활동이나 친구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기 어려워하는데요,

자꾸 한 발 빼고, 뒤로 물러나 있으려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럴 때 저의 마음은 정말로,

저 친구는 이런 단점이 있지...’라든지,

이 활동은 이런 면에서 좀 별론데...’와 같은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하고 따지는 마음, 혹은 단점을 보는 마음, 그래서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과 사건을 부처로 여기지 않는 마음. 이 마음들이 배움을 가로막는 마음임을 다시금 알았습니다.

 

 

 

이상으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

 

 

 

*****

 

 

p.s.

그렇다면 왜 저는 제가 만나는 사람과 사건을 최고의 것, 부처로 여기지 않는 걸까요?

부처로 여기면 결국 좋은 건 나인데 말이죠. 뭐가 손해길래, 혹은 뭐가 무섭거나 불만이라서 친구를 부처로 보지 않으려 할까요? 여기엔 어떤 생각/태도의 전재가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품고 생활하며, 친구를 부처로 보는 훈련을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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