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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자연학

자연학 발제 2장 8,9

게시물 정보

작성자 현슈 작성일15-11-13 11:41 조회88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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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학 세미나 / 안티오이디푸스 2 8,9(들뢰즈, 가타리) / 2015.11.12 / 이현수

 

안티-오이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글과 문장들은 그 자체로 어떤 분열자의 비이성적 인식의 표출을 글을 통해 그대로 적어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체가 그 자체로 분열적 상태, 욕망의 흐름 등을 표현하고자 한 것처럼 느껴졌다. 책과 이번 발제의 내용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분열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이다. 프로이트와 정신의학이 현실상실과 관련한 광기의 모습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면, 들뢰즈는 분열자들을 오이디푸스를 돌파하기 위해 벽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이야기한다. 들뢰즈는 분열증이라는 것이 몸이 곧 욕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상태이며, 이러한 분열증자의 존재가 말해주는 바를 이번 장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8. 신경증과 정신병

들뢰즈와 가타리는 분열자들에게는 오이디푸스적 억압-탄압의 체계가 분열자에 대립시켜 세우는 장벽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분열자들에게 오이디푸스의 삼각형은 수용할 수 없는 무엇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오이디푸스의 삼각형안에서 산다. 하지만, 분열자에게 오이디푸스삼각형은 그 자체로 참을 수 없는 그래서 환상을 발생시키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핍된 욕망 안에서, 그 결핍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존재, 그래서 그들의 이러한 병들을 욕망적 생산이라고 가타리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오렐리, 아드리엔 그리고 어머니, 이 모두는 성모(聖母)이다. 네르발은 삼각형의 진동의 극한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오렐리는 말한다, <당신은 하나의 드라마를 찾고 있어요.>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에 기입된다면, 모든 것은 극한에서는 반드시 오이디푸스 밖으로 도주한다.

(안티오이디푸스, 2, 224)

 

 하지만, 분열증 혹은 정신병의 경우와 달리, 신경증에 대한 해석은 위의 인용문처럼 정반대의 경우로 시작하는 듯하다. 그들은 오히려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안으로 침투하여, 그들의 욕망을 성녀라는 하나의 드라마를 생성시킨다. 어머니가 아니라 성모와 신을 만나는 새로운 돌파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삼각형 진동의 극한,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에 기입된다면, 그 극한에서는 반드시 오이디푸스 밖으로 도주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분열증자의 경우와 달리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느다. 단순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그 의미일까? 분열증자가 오이디푸스에 대하여 격렬하게 내부적 욕망이 표출되는 존재라면, 신경증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공진하여 오이디푸스와 함께 폭발해버리는 존재라는 것인가? 아무튼 저자는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간 원인은 욕망적 생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판코브는 말한다. <분열자가 아기 때 받지 못했던 돌보기를 해 주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환자에게 자기 몸의 극한을 인정하게 해 주는 촉각적인 몸 감각들과 여타 감각들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 무의식적 욕망의 인정이 중요하지, 이 욕망의 만족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은, 분열자가 몸을 사려 욕망적 생산을 침묵시키고 질식시키는 바로 그곳, 즉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욕망적 생산을 다시 작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중략) 이 생산성은 간접적 내지 상징적 만족과는 전혀 무관하며, 또한 그것이 정지해 있을 때나 작동하고 있을 때나, -오이디푸스적 퇴행은 물룬 오이디푸스의 전진적인 복원과도 구별된다.

(안티오이디푸스, 2, 230-231)

 

9. 과정

 그들은 우리가 분열증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빛이 종종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너무나도 닫힌 마음의 균열들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형식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 광기는 반드시 붕괴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돌파일 수 도 있다. (……) 자아 상실 또는 초월론적 경험을 겪는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혼돈스럽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때 그는 미친 사람으로 적법하게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참된 정신 건강은 그 어떤 식으로건 정상적 자아의 해체를 함축한다…….>

(안티오이디푸스, 2, 234)

 

분열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기존의 오이디푸스의 체계의 균열을 가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은 분열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여행을 떠난다. 가타리는 분열자를 통해 우리의 세계로 사막이 전파되는,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 말을 함으로써, 숭고한 병으로서 자신을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분열증은 현대인의 병으로서, 시대의 과정으로 인식되는 듯 하다. 평범한 사람의 너무나도 닫힌 마음의 균열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형식으로서의 분열증, 이러한 가타리의 표현은 분열이라는 현상이 곧 현재의 오이디푸스적 체계 안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대지의 욕망에 의해 균열되고 해체되어버리는 자아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위의 숭고한 병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렇기에 분열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살고, 결핍 위에서 그 자체로 분열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나의 해석이 맞던 틀리던 간에, 그들의 붕괴가 붕괴가 아닌 돌파로서 변화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완전한 해체를 통한 재생성을 말하는 것일까?

 화가와 작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에 대한 가타리와 들뢰즈의 표현 역시 분열증과 유사하게 해석된다. 그는 문학과 화가 터너의 작품이 곧 분열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문학이 곧 생산이라고 말한다. 예술가 역시 일종의 분열증을 앓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을 통해 그들 역시 앞에서 붕괴되고 돌파를 준비하는 존재로 변환되는 것일까? 그렇기에 분열자들이 사막을 세상에 전파하듯이 그들의 작품 역시 잠재성을 지닌 숭고한 <전이>들을 구하는 것일까?

 

분열증은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이 돌파의 실패이다. <어떻게 이 벽을 가로질러야 할까.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벽을 파고 줄로 갈아 가로질러야 한다. 내 느낌에 천천히 참을성 있게.> 그리고 여기에 걸린 것은 예술이나 문학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 기계, 분석 기계, 혁명 기계는 억압-탄압 체계의 약해진 틀 속에서 이것들을 작동시키는 외래적 과계들 속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이것들이 단 하나의 욕망 기계를 배양하는 흐름 속에서 서로 부품이 되고 톱니바퀴가 되고 또 일반화된 폭발을 참을성 있게 점화된 그 수 만큼의 국지적인 불이 되거나, 이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열증이지, 기표가 아니다.

(안티오이디푸스, 2,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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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Helene님의 댓글

Helene 작성일

Thanks for shingra. What a pleasure to read!

Frenchie님의 댓글

Frenchie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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