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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세미나를 들은 보라(복수자^^)로서 과제를 써 보았습니다.
이미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되는 것인데...이차적인 구술(문자를 기반한)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해도 구술과 문자의 심연은 멀고도 깊은가봅니다 ㅎㅎㅎ 좀 더 멋지고 탁월한 복수자(?!)가 되고 싶네요. 그래도 쓰면서 세미나원 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재미있었습니다 ㅎㅎ
매번 세미나 때마다 복습이랄까요,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만 먹고 안하게 되었는데요. 선생님들과의 약속의 힘으로^^;; 어떻게든 글로 정리해보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뵈어요!
220617(orality and literacy_2)bora.hwp
인류학세미나 s2 /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서문-2장, 과제 / 2022.06.17 / ‘신화세미나를 들은’ 보라
복수자(複數者)로서 쓰기
쓰기는 우리로 하여금 ‘말’을 사물과 동일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이라는 것을 말의 해독자(decoders)에게 신호하는 가시적인 표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이기우 · 임명진 옮김, 문예출판사(2012), 23쪽)
쓰기는 독점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무슨 어원과 같은 역사적인 연결에 의지할 것도 없이 다른 것을 자신 속에 동화 · 흡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같은 책, 24쪽)
월터 옹은 쓰기는 말을 “사물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독점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국주의적 활동은 “다른 것을 자신 속에 동화 흡수”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이는 한 가지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며, 다양성을 배제한다는 것이기도 한데요. 그렇게 본다면 “정형구”를 대대손손 반복하여 되풀이하는 구술 문화 또한 제국주의적 활동처럼 느껴집니다. 문자나 구술이나 같은 이야기를 강요한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음에도 왜 월터 옹은 문자 문화만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보았을까요?
구술과 문자 모두 ‘같은 이야기’를 ‘강요’한다
앞서 말씀드렸든 구술문화(일차적인 구술성)는 “정형구적인 사고와 표현”에 의존합니다.“해묵은 관용 표현들”, 즉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오랜 세월 동안 산출된” 말의 덩어리를 사용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구술성 시대의 배움이란 격언과 같이 정형화된 말들을 되풀이하고 외우는 “집단적 회상”에 가깝습니다.
문자를 사용하는 우리는 이런 “진부한 상투구”를 쓰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오래된, 기존의, 누군가의 생각을 답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형구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구술 문화 사람들이 오히려 기존의 전통, 하나의 생각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구술성 또한 제국주의적 활동처럼 여겨집니다. 오히려 ‘강요’하는 것의 다양성 측면을 놓고 보면 구술성이 문자성보다 더 제국주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구술성은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도록 강요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아버지도 되풀이해야 하며, 앞선 세대들이 반복한 ‘같은 말’을 나 또한 외워야 합니다. 물론 문자 시대를 사는 우리도 ‘같은 이야기’를 강요하기는 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이야기를 모두가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구술성과 문자성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강요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차이를 구별해보면서 월터 옹 선생님이 쓰기로 말하고 싶었던 ‘제국주의적 활동’이 무엇인지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복수로서 말하는 세계와 단독자로서 쓰는 세계
구술성과 문자성 모두 “다른 것을 자신 속에 동화 흡수”합니다. 하나로 동화-흡수 한다는 점에서 강압적이지만, 그 과정과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술은 화자가 복수자로서 말하고, 이야기는 일회적입니다. 문자는 단독자로서 쓰고, 쓰여진 후에는 문자로 고정됩니다.
구술 문화에서의 정형구, 이야기 덩어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따라서 구술하는 ‘나’는 단독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자로서 말합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온 우리로서 말하는 것이죠.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해진 정형구로 이야기하지만 그때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구술하는 자는 자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정형구들을 조합하지만, 운율이라든지, 듣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들을 선택합니다. 정형구의 조합 또한 이야기를하는 사람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즉 구술의 세계에서는 여럿이서 여럿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상황이 끝남과 동시에 이야기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묵은 관용 표현”들은 매순간 다르게 조합되고 사라집니다.
반면 문자는 단독적이고 단독자로서 ‘나’의 말을 모두가 똑같이 하도록 강요하죠. 우리가 쓰기를 한다는 것은 “그 말을 억지로 시각적인 장(場) 안에 영구히 고정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변하고 있는 연속적인 흐름에서 한 순간, 한 지점을 절단하여 시각화(문자화)하고 사물화하는 것이죠. 그리고 해독자는 “단어에 관해서 생각해보라”고 요구받죠. 그래서 우리는 문자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면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그 ‘문자 안’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 문자가 가리키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저자가 그 내용에 무엇을 담았는지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공간에 고정시키면 우리는 그 말이 지시하는 걸 사물처럼 느끼게 됩니다. 물론 고쳐 쓸 수는 있습니다만, 고쳐지기 전까지 언어는 혹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고정된 사물이 됩니다.
문자를 쓰는 나는 정말 단독자일까
그렇다면 구술성과 문자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화자인 ‘나’가 복수로서 말하는가, 단독자로서 말하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자를 쓰는 우리는 단독자로서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만의 언어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아무리 다른 사람을 동화시키려고 한들 말을 통하지 않는데 가능할리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는 이미 과거를 비롯한 모두와 함께 만들고 써온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나’만의 생각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나의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환경,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 겪어온 사건들, 내가 배우고 익힌 과거의 것들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자 문화를 사는 우리 또한 구술 문화를 살던 사람들처럼 복수로서 쓰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매체인 문자의 특성인 시각화, 사물화로 인해 우리가 복수로 사고하고 쓰고 있다는 것을 감각하기 어려워진 것이 아닐까요.
복수의 나로서 쓰기위해 노력하기
실제로 구술문화(oral culture)에서는 고도로 예술적이고 인간적 가치를 지닌 강력하고 아름다운 언어적 연행이 산출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적 연행은 일단 쓰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이미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쓰기가 없었다면 인간의 의식은 그 잠재능력을 더한층 발휘할 수 없으며, 그 밖의 아름답고 힘찬 작품을 낳을 수도 없다. (같은 책, 28쪽)
옹은 문자의 세계를 통과한 순간, 다시는 구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앞서 구술성과 문자성의 큰 차이점을 자신을 복수로 보는가, 단독자로 보는가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구술성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복수로서의 자신을 감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요. (옹 선생님을 비롯, 플라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 『일곱 번째 편지』 등에서 “쓰기가 지식을 처리하는 수단으로서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질문에 무책임하고 기억력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쓰기를 유보할 것은 심각하게 표명”하였다고 하는데요. 다른 것은 이해가 갔으나, “비인간적”이라고 하는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문자는 구술과 다르게 인간의 신체 밖에 있기 때문인걸까? 생각했는데요. 만약 플라톤의 시대가 아직 구술성의 시대였다면 (혹은 과도기였다면) “인간”을 어쩌면 복수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은 원래 단독자인 개인이 아니라 복수적인 존재였던 것이죠.)
옹 선생님도 애초에 다시 구술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쓰기가 가져다준 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중요한 것은 문자를, 무엇보다 문자를 통해 언어를 쓰는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자가 가진 잠재력을 이해하고, 문자를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이를 위해 어떤 윤리와 훈련이 필요한지를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문자를 버리고 구술의 문화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복수의 나로서, 사물화하지 않고 문자를 쓸 수 있는 방식이랄까 태도를 발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