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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입문 시즌3-3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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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승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1-17 12:41 조회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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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입문 시즌3 3주차 후기(20201111)


안녕하세요! 서양철학입문 B3주차 후기를 맡은 우승희입니다. 세미나 마지막에 참여하여 그동안 나누셨던 깊은 이야기를 알지 못해 아쉽지만...지금이라도 같이 공부하게 되어 무척 즐겁습니다~

이번 주부터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를 읽기 시작했어요. 호정쌤께서 시작하기에 앞서 푸코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뭔지, 한 권의 책을 어떤 주제로 끌어가고 있는지를 알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들어가며 부분을 돌아가며 강독을 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는 방식으로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또 파레시아, 진실 말하기가 푸코가 말년의 가서 잡은 개념인 만큼 무엇을 보신 것일까? 이 개념은 도대체 뭘까? 라는 물음을 던지고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맨 먼저 호정쌤이 준비하신 이야기는 아첨과 분노였어요. 이는 파레시아랑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 말하기가 꼭 다른 영혼이 필요하고 나 혼자 할 수 없다지만 (파레시아와 아첨은 대립하기에)아첨하는 다른 누군가는 필요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아첨과 분노는 쌍을 이루는 악덕인 것일까요? 자기제어불가(자기통치)와 타자 제어불가(타자통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실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도덕적 관건인데요. 분노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에 통제 불능하고, 아첨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의존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에 참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관계에 대한 고민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계속되어왔습니다. 어떻게 권력은 원하는 대로 언제나 태생의 신분에 따라 행사되어야 할 신분의 특권과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권력 행사가 개인의 신분적 우월성이 아니라 개인이 수행해야 할 정확하고 구체적인 임무 매에서 규칙을 갖는 정확하고 한정된 기능이 될 수 있을까요? (주체의 해석학401p)

호정쌤이 분노를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는데 파레시아, 분노, 아첨에 대해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장착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입니다. 진실 말하기가 아닌 분노 말하기로 어떠한 제동도 걸지 않음을 스스로 느끼고, 사후적으로 돌아봤을 때 허망함을 느끼는데 왜 안 되는 것일까? 어떻게 실천의 윤리로 가져갈 수 있을까? 분노를 일으키고 다니면 결국에 달려드는 건 아첨하는 사람들인데 그 안에서 계속 살고 싶나? 왜 분노를 좋다고 믿고 허용을 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이번 시즌 잘 마무리하며 계속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문영쌤께서는 파레시아에 대한 것에 수용하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지, 파레시아가 아닌 것에 대한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장금쌤과 곰쌤의 예를 들며)라고 하시고, 하지만 파레시아를 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동엽쌤은 파레시아스트는 언제나 동일 한 것에 기뻐해야 하고, 동일한 것들에 동의해야 합니다. (담론과 진실71p) 라는 구절처럼 듣는 자가 말하는 자의 가치판단, 철학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의연 중에 내비쳐야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말할 맛고 말입니다.

또 자기배려가 이기주의로 흘러가지 않을까하는 우려하고, 한편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동엽쌤이 말하셨는데, 파레시아와 같이 가며 그러한 경향들을 바로잡아 주는 예방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성지쌤께서 자기배려는 불어로 고민, 고려, 생각을 뜻한다고 말씀해주시며 기존의 한글로 받아들이는 자기배려와는 다른 엄격한 느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타자 앞에 불려 나가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 점검을 받아야 한다 ~ 왜냐하면 선동가들의 아첨보다도 더 위험한 아첨,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다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아첨이 있기 때문이다. (담론과 진실17p) 라는 글에 대해 호정쌤께서 타자,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점검으로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고 하셨고, 성지쌤은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점검은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 가야할 것인가? 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용제는 지금 어떻게 파레시아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던졌는데 이에 대해 동연쌤은 지금 세미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제는 나의 파레시아를 허락하고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가이다. 또 여기서 자기배려와 나르시즘이 어떻게 구별되지? 라는 물음이 나오는데 둘의 차이는 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지 없는 지로, 자기애가 있다면 파레시아를 했을 때 자기방어를 함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자기배려 그리고 자기해체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배려의 기회는 솔직하게 말함으로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성지쌤이 덧붙여 주셨어요.

호정쌤께서 아첨에 관해서 자칫 좋게 넘어가려다보면 아첨으로 흘러가기 쉽기에 무척 어렵다고 말하며, 연륜의 기술이 대단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 카이로스(적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며 엄청난 관심, 관찰, 사랑이 필요한 일이라고 동연쌤께서 보태주셨어요.

또 파레시아를 유발하는 것은 간절함(더 나은 나를 위한 영혼)이라고 성지쌤이 말하시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파레시아를 하고 싶은지, 그 정도로 나를 바꾸고 싶은 지, 간절히 원하는 지 등의 전제가 중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이런 담론들은 그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파레시아, 진실말하기의 주체가 왜 스승에서 제자로 넘어간 것일까? 라는 질문에 호정쌤이 답을 해주셨는데 기독교의 고백, 모든 것을 다 말하기 같은 자기포기에 들어서며 초월자에 의한 구원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 파레시아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쪽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멋진 문장을 호정쌤이 읽어주셨습니다.

파레시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첨을 받는 자가 아첨을 하는 자에게 계속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자가 어떤 순간에 타자의 담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 이 진실된 담론을 내면화하며 주체화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체의 해석학406p)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이 세상에서 도달 가능한 모든 복학에 도달한 주체, 지혜로운 주체, 덕 있는 주체를 특징짓는 자기 자신과의 숭고한 관계를 통해 그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축하는 데 성공하도록 하는 게 근본적인 관건입니다. (주체의 해석학413p)

 

책을 읽으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는데 같이 이야기하고 나누며 정리가 많은 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같이 공부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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