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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불교와 현대 과학 시즌3 -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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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9-27 13:51 조회9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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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공부에 들어가면서, <반야심경>’, <금강경>즉비에 비해, <법화경>의 키워드는 <무량>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가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무량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고, 토론 역시 이로부터 시작했다.


우선 불경의 이나 윤회등의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시간관념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생각.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이렇게 끝을 알 수 없고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단위는 아마도 우리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고자 함이었을 텐데, 오히려 우리는 이를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비교하며 한없이 작아지고 비겁해지는 변명거리로 이용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게 용렬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나를 확장하고 타인을 구제하는 용맹한 마음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의 관성은 무한한 시간을 말할 때 자동적으로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면서 그 양과 크기에 겁먹고 마는 듯하다. 과연 법화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그렇게 크고 많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시간을 이렇게 일방향적이고 직선적이며 미래를 향해 무한히 뻗어가는 어떤 것으로 상상할 때, 부처가 되는 길은 이 생의 문제가 아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추상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법화경은 부처가 되는 길은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 할 단계가 아닌, 어느 찰나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되뇌인다. 그저 앎만을 추구하는 것은 살아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삶이 불성으로 변화하는 길은 내가 안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은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질을 영원히 바꾸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시간의 범위는 내 생의 반복인 윤회까지 넓어지는 한편, 내 이번 삶에도 아니 오늘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내가 알아차림을 통해 변화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업을 끊고 언제라도 새로운 존재로 윤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반복은 결코 동일하며 단순한 복사의 행위가 아니다. 반복은 차이를 낳고, 그 차이를 감각하는 한 그것은 결코 반복일 수 없고 지루할리 없는 새로운 시도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것은 분별심은 버리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다. 예를 들어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란 구절에도 우리의 마음은 각기 다른 결로 복잡해졌다. 책에서 언급된, 배상요구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스리랑카를 칭찬하는 일본의 작가나 최근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인한 한국 검찰 등에 대해서 일단은 이해보다 분노가 먼저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이상 우리는 어떤 것도 결국 같은 인연장에서 무한반복일 뿐이라는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같아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다르게 인식하며 수행해가는 일보다, 달라보이지만 완전히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일이 훨씬 더 익숙하고 편한 것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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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문리스님의 댓글

문리스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 이 말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지난 시간 기억이 새록새록.^^  머리로 먼저 아는 것들이 있긴 있는 것 같아요,그렇다고 해서 머리와 몸이 따로라는 건 아니지만, 어떨 때는 몸이 먼저 반응하고 어떨 때는 머리가 반응한달까... 뭐 그런! 원한으로 원한을 갚지 않는다는 건, 원한을 무효화시킨다는 게 핵심 아닐까 싶어요. 원한이란 게 일방적일 수가 없고 어쨌거나 '이 나'의 인연이 연기되어 있다는 의미인데, 원한으로 원한을 상대하는 한 '이 나' 역시 그 원한 속에 머물러 있어야한다는 뜻일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말이 사건 자체를 모른체 한다거나 없었던 것으로 한다거나 무조건 다 용서(?)한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부처님 말씀에선 이 조차도 집착일 뿐이라 말씀하실 것 같다는 두려움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포자기와 냉소 정도는 우리가 피해야 할 최소한의 분별지일 듯. 후기 잘 읽었습니다.^^

푸른달님의 댓글

푸른달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늘 명쾌 상쾌한 코난샘의 글!(이거슨 삼 유금의 파워인가!) 그리고 늘 지금의 문제적 시공간으로 우리와 텍스트를 이끌어주시는 샘 덕에 ‘원한’ 문제도 다시 생각해 보게되었어요.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는다는 것이 저에게는 더이상 그것이 문제가 아닌 차원으로 우리의 인연장을 어떻게 이끌 수 있을까?로 이해가 되었어요. 물론 그 인연장을 바꾸는(접속하는) 행보가 보이는 것으로만 봐서 회피나 도피로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찌보면 도피나 회피라는 것 자체가 마치 원한을 제대로 갚는 고정된 어떤 공식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그 전제 자체는 각 사회가 통상적으로 가진 관념이나 상식에 기대고 있는 것도 같아서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할 지점이라고도 느껴졌어요. 저는 지난주 읽은 부분에서 부처님은 우주 만물 각각을 모두 분별하여 그들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지만 마치 큰 구름이 온 세계를 두루 뒤덮고 일시에 비가 내릴 때 각각이 자신의 감당 능력에 맞게 그 물기운을 흡수하게 하신다는 부분이 가장 좋았어요. 우리 모두는 차이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부처님 비를 100퍼센트 흡수할 능력이 모두에게 있기도 하단 말씀인 것 같은데 그렇게 때문에 나는 아직 안되겠어 라는 마음이 용렬하다는 것이겠지요. 무량한 시간도 같은 맥락에서 느껴보면, 나라는 존재가 아주 찰나적이나마 사라지는 깨달음의 순간, 부처님 비 100퍼센트 흡수하는 순간?의 시간의 질적인 농도... 같은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