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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현대과학 시즌2> 5차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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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17 16:04 조회23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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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즌 과학 공부에서도 놀라웠는데 이번 시즌에서도 또 역 시 놀라고 있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장님이 무작정 길을 나서는 듯한 경험의 연속입니다. 혹은 반대로 너무나 딱딱한 상태로 굳어져 인식의 전환이 잘 되지 않는 맥락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빛과 시공간으로 상정되는 경험 과학의 관점에서 젖어 있어서 중성미지에 대한 개념이 와 닿지 않더라구요.

왜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가?라는 책은 최신 소립자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물질로 존재하는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우주에서는 물질과 반물질이 쌍생하고 둘이 만나 쌍소멸한다고 합니다. 이 맥락으로 본다면 우리는 소멸했어야지 존재할 수 없는 물질입니다. 쌍생성이 이루어진 후 대칭이 깨져 한 쪽으로 뭉쳐진 물질 즉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가 존재하는데 있어 대칭을 깨는 3항이 있는데 그것이 중성미자라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랍니다. 중성미자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대칭이 깨진, 기울어진 상태, 뭉쳐진 상태의 물질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업이 처음 시작되고 한참동안 우리는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왔고 이럴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험의 세계, 경험의 관점에만 머물러 있어 대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개념조차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책을 읽을 때는 쉬운 듯하여 술술 읽었는데 모르고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이또한 책을 읽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겠지요^^

양자역학은 너무나 작고 작아 그리고 예측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어 완전 작은 과학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세계가 바로 우주이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 과학 세계라는 근영샘의 설명에 무척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분과 전체, 동시이면서 전체라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작은 세계가 곧 가장 큰 세계와 같다는 것, 하나가 하나이면서 전부라는 진부한 말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듯 했습니다. 이 맥락은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어떤 지점과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책에서 태양 빛이 밖으로 나오는데 수 천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내부에서 발생 되는 빛이 있고 이것이 밖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참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빛이 발생 되어 나올 때 중성미자도 같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성미자는 물질과 반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라야마씨는 중성미자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면 태양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근영샘은 이 부분에서 우리가 본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는 가시광선의 세계를 봅니다. 도대체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성미자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불경 읽고 나누는 시간에도 근영샘이 본다는 것에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서 이번 질문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물질과 반응하지 않으며 존재하고 반물질을 흡수, 이용하여 대칭을 깨트리고 물질을 이루게 하는 중성미자가 왠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태도와 같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것에는 반응하고, 어떤 것은 통과하듯이 반응하지 않고, 또 반물질을 흡수 이용하여 다른 것을 존재시킬 수 있는 제3항의 중성미자 성질이 삶의 태도나 방식에 어떤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리학은 어떤 실체를 상정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을 처음 접할 때도 이 부분이 깨지지 않아 무척 어려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요. 책 속에 등장하는 개념이나 정의는 그야말로 그렇게 부르자라고 한 것이지 어떤 실체화를 시키는 과정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번 근영샘의 설명으로 만나게 된 과학이라는 학문의 매력이 물씬 나는 지점이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저는 자꾸 그 개념과 정의에서 실체를 찾아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했으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문샘이 주역에서 음양이 만나 오행이 되는 순간 만물이 생긴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3, 5는 기존의 경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건을 상징하는 숫자와 같다고 말해주셨습니다. 두 항만 있으면 사건,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아 블랙홀이 된다고 합니다. 직선을 넘어 외부가 생기려면 둘이 아닌 제3항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쯤에서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안정된 삶, 편안한 삶, 직선처럼 변화 없는 삶을 원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블랙홀과 같은 삶일 수도 있겠다라는. 우리는 블랙홀같은 삶을 지향하기보다 균형을 깨뜨려 외부를 생성하는 제3항과 같은 존재가 되도 되겠구나! 과학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리과학이 제3항으로 나에게 작동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 후반쯤에 현대인들은 엄청 바쁘게 사는데 그것은 시간을 더 많이 잘 쓰기 위함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시간을 잘 쓴다는 것에서 어떤 시사하는 바를 찾고하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 즉 빛의 시공간에서는 바쁘게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과 빛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유의미한 시간차, 시간변화를 가질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것, 동시이면서 전체라고 하는 것에서는 달리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의 시간, 속도로 간다는 것은 빛의 속도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 공이라는 개념이 이 부분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빛의 속도에 도달한다는 것은 물리로는 광속이지만 삶에서는 빛보다 빨리 가는 문제가 아니라 속도에 구애 받지 않는 살은 무엇인가? 라는 맥락으로 질문할 수 있다고 짚어졌습니다.

우주에 우리와 같은 물질로 존재하는 정도는 4%정도라고 합니다. 샘들께서 방에서 4%, 우주에서 4%라고 비유를 해주셨을 때 확 와 닿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토록 엄청나게 미미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치우쳐져 뭉쳐진 존재, 그러나 빛의 속도에 혹은 빛으로 머무를 수 있는 경험으로 가는 수행이 가능한 존재이기도 하답니다. 그것이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불교가 이토록 멋지게 만나다니 남은 시간도 참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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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달님의 댓글

푸른달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무영샘 덕에 지난 세미나가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우리가 수천년전 태양빛과 만나고 있다니!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과거라니!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느꼈지만 물질의 존재 자체가 기적 같습니다. (그런데 해탈하면 쌍소멸인가요?? ㅎㅎ)더불어 우린 모두 별에서 왔으니까 정화스님 말씀하시듯 우주와 동시 전체로 감응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경이로운 과학불교 불교과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