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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와 현대과학> 3차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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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2-27 01:35 조회42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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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핫!한 앎들이 터져 나왔던 같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보통 경계라 하면 구분, 구별 짓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정화 스님의 글을 읽고 다른 깨달음이 있었다는 문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경계는 구별하고 나누고 구분 짓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경계가 없어라는 말에는 이미 나와 너의 경계를 안다는 겁니다. 내가 아닌 것이 있다는 걸 안다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샘은 경계는 나 아닌 것들을 넘어가는 세계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경계는 나와 너를 가르지만 접속하고 만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계를 안과 밖을 나누는, 배타적으로 분리되는 힘으로 볼 수 있는 측면과 경계로 나아가는, 타자를 만나러 가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내가 경계를 지운다는 건 타자를 만나는 행의 단초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이 말을 근영샘은 신통으로 연결해주셨는데요. 신통하다라는 것은 마술, 미신적 감각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계를 넘어서 타자와 접속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신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내 틀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이해하는 경우가 바로 신통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통함은 이미 우리 안에 베이스로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과 해탈이 가능한 것이라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신통은 나의 한계, 경계를 넘어서는 행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샘의 깨달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이어져 갔습니다. 헌데 그게 너무 강렬한 탓이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때! “무명이요~ 무명이요~ 칠식이요~ 칠식이요~” 라는 근영샘의 명료한 일침이 문샘에게 내리쳐졌습니다. 그래서 문샘은 결국 깨달음의 증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인가 받지 못했습니다^^

문샘처럼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확~ 하고 혹은 짜릿하게 열림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상태, 즉 내가 깨달았다고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앎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앎만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유식이라고 합니다. 니체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해석 체계, 앎의 체계이며 이 세계는 각자의 앎의 체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에서 근영샘이 불교에서 말하는 십이연기가 이해가 된다고, 신기하다고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볼 때. 무명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자기동일성을 딱 발생 시키는 무명인데, 이게 계속 움직이는 어떤 체계가 발생하면 여기에서 앎이라는 것이 형태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정보가 발생하듯이요. 그런 앎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몸과 마음이 덧붙게 되고 그래서 그로부터 기관이 나눠지고 육근, 육경이 생기고 이것이 하나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여기에서 촉, , , , 유가 생기고 생노사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사유가 지금의 우리는 정보이론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부처님은 그 당시에 이렇게 이해했다는 것이 놀랍다고 근영샘은 마무리해주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식의 체계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마음, 즉 몸에 상대되는 것으로 생각해 유식을 유심으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식의 세계관으로 전 우주를 앎의 체계로 놓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앎이라는 것, ~~~!!” 하는 순간이라는 것. 그 순간이 온전히 분리되지 않고 딱 그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 그렇구나!”로 오는 것, 그것은 유식이자 만남이고 관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닫다, 깨치다라는 것은 단지 나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와의 접속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른 세계가 드러나는 장이자 나와 다른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경계 위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영토 위에 살고자 한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영토 안의 삶은 포섭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계 위에 있다는 건 접속의 순간으로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딱 펼쳐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경계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고 만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계는 공한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관계가 생성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공하다는 건 온 세계가, 존재가 부처님 안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장이 될 때 경계가 업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기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신통한 주문에 대한 해석도 듣게 되었습니다.

십이연기는 무명 시작하는데 신통한 마지막 주문은 행이라는 것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에서 아제는 가자, 바라는 완성, 승은 함께, 모지는 처음, 사바하는 끝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완성으로 가자내가 이미 완성이다로 읽을 수 있고요. 여기에서 승 즉 완성은 모두의 것으로 또는 완성인 함께로 가자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지 사바하는 모든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마지막이자 처음인 것으로 이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행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은 행인데 마지막 신통한 주문에 행이 있다는 것이지요. 가자 가자, 이것은 걸아감 즉 감이라는 행 자체라는 것이지요. 종국에는 이 행이 바라밀로 행함을 일컬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존재에게는 행이 전부라는 것, 즉 들숨과 날숨, 한 발을 내딛고 다음 발을 내딛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하나 틀면 되는 것이고 주머니에서 꺼내기만 하면 되는 너무너무 간단한 것인데 너무너무 어두운 무명의 삶에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명쾌한 마무리를 근영샘이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심오한 깨달음이 오고가는 장이었건만 저한테는 어렵고 생소해 후기는 받아 적어 옮겨 놓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계속 불교 세미나를 하다보면 어떤 경계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접속하는 때가 있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양자역학 수업을 절반 정도 읽어 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대략 87쪽이지 싶습니다. 확실히 알고자 하시면 문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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