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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크로스, 우리도 철학한다!] 시즌2 5주차_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II』 강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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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라 작성일20-07-26 12:09 조회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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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II』 강독 후기

제 2부 초월론적 동기에 대하여 - 1. 정신의 장소

『탐구』를 읽으며 반복의 효과(?)를 실감하게 됩니다. 지난 주까지 읽은 1부 내내 '고유명'을 반복한 고진이었는데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 하도 반복해서 그런지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1권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과 '독아론', '가르치다/배우다' 등등을 반복했던 고진입니다. 이번 2부에서는 또 어떤 말을 반복할지 기대(?) 됐는데요.


고진의 데카르트 옹호 :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데카르트가 아니야!

데카르트,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야기(?)한 철학자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저만 그랬을 수 있고요). 그런데 고진은 이러한 이원론(정신/신체, 주체/객체)은 데카르트 이전부터 있었으며, 오히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러한 이원론을 거부할 때 비로소 '정신'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비판하려면 그가 말하는 ‘코기토'가 무엇인지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요.

수영 샘 말씀대로 저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이러한 통념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고진이 보기에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흔히 말하는 ‘코기토'와는 다릅니다. 고진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내성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통념적으로 ‘코기토'는 내성적인 것으로 여기는가 봅니다. 이 ‘내성적인 것'은 고진에게 있어 ‘독백적인 것'인 것이죠. 이번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통해 독아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루소를 통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한 레비-스트로스의 긴긴 글을 인용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나에게 이방인, 미지의 인간, 요컨대 누구도 아닌 인간이다. 그렇게 소망한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나, 그들로부터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한 이 나 자신은 누구인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우선 첫째로'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인식한다고 하는 민족(속)학이 인간 의식에 부과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속에서 자기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_가라타니 고진, 『탐구 II』, 새물결, 76쪽, 재인용

레비-스트로스는 루소가 자기동일성(내성적인 것)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만들어냈다고 보았습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존재, 이방인, 미지의 인간을 만나는 순간 ‘나’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생기는 것이죠. 이를 질문하지 않고 자신을 확고한 것으로 인정하는 순간 타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의 동일성을 강하게 유지한 상태에서는 타자가 나의 동일성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타자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나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생겨야만 하는 것이죠. 자기동일성이 견고하고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다면, 타자와 만난다는 건 불가능해질테니까요.

이에 반해 데카르트가 “자아의 명증성에 사로잡혀"있는 “코기토를 출발점으로 놓고" 있음을 레비-스트로스는 비판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로는 ‘나는 존재하는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죠. ‘나를 타자로 볼 수 있는 ‘그'가 되는 경험’, “내 속에서 자기를 생각하면서 도대체 생각하는 것은 나일까라고 나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그'가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고진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해답은 그저 ‘나는 생각한다'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데카르트 비판은 구조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가 데카르트의 후예(특히 사르트르)들의 실존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내세운 전략이었다는 것이죠. 고진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인용하며 “그가 사변적 철학가이기는 커녕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인류학자'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관찰해보았을 때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래서 내가 이로부터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우리에게 아주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고 이로써 나는 선례와 관습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을 너무 굳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같은 책, 78쪽, 재인용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라는 것, 그리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민족 전체라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진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진리성이 만족스럽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사람의 견해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_같은 책, 80쪽, 재인용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다종다양한 혼인 형태나 신화 속에 말하자면 보편적인 ‘이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여행과 탐험이 찾아낸 다양성을 제거해야만 진리(보편적인 ‘이성’)가 나타난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내용(의미)를 배제하고 단지 ‘요소와 관계의 형식적인 집합을 이끌어”내는 “구조론적 분석”을 시도하게 됩니다. 고진은 이러한 레비-스트로스가 루소가 아닌 데카르트를 인용해야했다고 안타까워(?)하는데요. 고진이 보기에 수학자였던 데카르트야 말로 구조주의의 선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바깥에서 의심하는 공=간’

고진이 보기에 “‘코기토’는 내성적인 동시에 내성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기묘한 ‘장소’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가 서 있던 그 기묘한 장소는 “당시 가장 발달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고진은 이곳이 ‘시장’이었음이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1권에서 강조했던 ‘말하다-듣다’가 아닌 ‘가르치다-배우다’(사다-팔다)의 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장소였기 때문이겠죠. 교환은 동일한 정체성에 갖힌 채로는 어렵습니다. 이 교환의 장소(시장)은 프랑스도 네덜란드에도 속하지 않는 ‘장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의 장소 즉, “공=간”이 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바로 이 사이의 장소,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공간 있는 자는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이 공간에 있을 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며, 비로소 “나는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고진은 데카르트가 사이 공간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없게 됐고,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나의 존재’를 보장하기 위해 ‘신’을 도입하게 됐다고 봅니다. ‘신’만이 ‘나의 존재’를 보증해줄 수 있다는 말은 바꿔말하면 내가 나임을 보증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과 같은데요.

“우리가 아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명제의 진리성조차도 신이 존재 또는 현존한다는 것, 그가 완전한 존재라는 것, 또 우리 속에 있는 것은 모두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_같은 책, 87쪽, 재인용


데카르트는 대상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과 진리의 일치를 ‘신’만이 보증해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관념이 저 대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내 외부에 있는 대상을 직접 알 수 없고, 나의 감각을 통(과)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나의 감각을 통해 얻게 된 관념’일 뿐,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확실히 알 수는 없게 되는 것이죠. 타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 또한 자신의 감각에 의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결국 외부의 대상 그 자체(진리)를 알 수 있는 건 신 밖에 없게 됩니다. 신이 필요해지는 것이죠(이때 신을 없애기 위해서는 신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닌 전제를 바꿔야 합니다. 신이 필요한 이유는 ‘대상 = 관념’의 일치라는 전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상과 우리가 만나는 과정을 바꿔야 신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전제를 바꾼 대표적인 철학자가 칸트라고 합니다).

이제 고진은 데카르트주의자의 ‘내성적인 코기토’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주의자도 비판자도 이해하지 못한”걸 자신이 했다(^^?!)며 강조(자랑?)하는데요.

데카르트의 ‘나’가 존재하는 까닭은 그가 자라났던 프랑스 또는 유럽이라는 공동체 속에서의 ‘사유’ 그 자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한에서 ‘정신’이 존재한다. 의식 혹은 자기의식은 ‘정신’이 아니다. ‘정신’이란 의식 혹은 자기의식의 외부에 존재한다. 물론 이것도 의식의 이상 내부에 존재한다. 그러나 ‘코기토’를 특징짓는 것은 오히여 그러한 외부성인 것이다. _같은 책, 84쪽.

데카르트의 ‘정신’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바깥’, 즉 ‘의심하는 것’이 됩니다. 고진은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단지 ‘사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습관’속에서의 사유를 괄호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습관’을 요구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관습, 사유, 습관에 괄호를 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따른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그의 이론을 수정했으나, 그 결과 “초월론적 ‘코기토’의 ‘외부성’이 소멸됐음을 비판합니다.

현상학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에 괄호를 치는 것을 말하는데요. 대체로 우리는 세계가 바깥에 있고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적 태도는 세계(대상)와 나의 의식이 일치하는 것이 진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후설은 인간의 의식(주관)이 세계로 달려가 '구성'한다고 보았는데요. 나의 의식이 세계를 물들이는 것이죠. 예를 들어 건물의 앞 면만 보고 뒷면이 존재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산 너머에 가보지 않고 '당연히' 산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무대장치처럼 텅 비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죠.

이러한 ‘자연적 태도’에 괄호를 치고 판단을 중지(epoke)할 것을 요청하는 현상학적 환원은 ‘감각, 꿈, 악령으로부터 기만을 당하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온 것인 것이죠.



외부에 존재하는 두 가지 방법 : 초월적transzendent / 초월론적transzendental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각각의 공동체의 습관(제도, 시스템) 속에서 생각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바꾸어 말해 그것은 눈을 뜨고 깨어 있는 가운데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환영이거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환상을 환상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과학적인 객관적 사실 같은 것이 가능하다면 아무런 수고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러한 ‘객관성’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

다른 인간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스스로를 ‘초월적’입장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진리’를 말하기를 회피하는데 그의 회의의 근거는 어떤 공동체(시스템)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에서 밖에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_같은 책, 86-87쪽

데카르트는 꿈에서 깨어 나올 수 있다고 여기는 걸 ‘초월적인’입장을 비판합니다. 대신 초월론적인 방법으로만 환상을 환상으로 볼 수 있고 그때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바깥/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은 2가지로 나누고 있는데요. 1) 하나는 초월적transzendent방식으로 자신의 토대하에 다른 것들을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입장, 나의 입장을 확고히하는 것이죠. 2) 다음은 초월론적 transzendental 방식으로, 나의 입장조차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태도인 것이죠.


데카르트의 이원론 : 정신 / 기계(신체)

데카르트의 정신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서의 시스템 속에서의 ‘사유에 대한 의심”이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정신(의심) 외에는 모두 ‘신체’라고 보았습니다. 즉, “제도, 구조, 시스템, 규칙”과 같은 “습관으로서의 시스템 속에서의 ‘사유’” 또한 ‘신체’라고 본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러한 ‘신체’가 ‘자연’과 같은 것으로 모두 ‘기계’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심리적, 문화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유기체는 사이버네틱한 기계이다. 유전자의 자기재생산 장치는 기계이다. 생물계의 상태는 기계이다. ‘사유’ 또한 기계적이다. ‘생각한다’는 것을 뭔가 특별한 사태로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 인공 지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기계는 ‘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계가 ‘정신’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같은 책, 91쪽.

그리하여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다른 ‘기계’일 뿐입니다. 이 기계가 ‘정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언어’인데요. 물론 언어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 체계 또한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기계적인 습관’을 의심할 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앞서 고진은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통념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시작했는데요. 고진이 본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통념적으로 생각하듯 내성적인 것이 아닌 사유의 바깥에서 의심하는 ‘정신’이며, 이 ‘정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신체(기계)’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기계’를 나누는 것으로,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듯 ‘사유(생각)/신체’의 이원론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그런데 수영 샘께서는 언어(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단순히 '정신의 조건'을 갖추는 것만으로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언어는 돌도끼 같은 단순한 도구(수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언어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동물(기계)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단계로 간다는 것은 커다란 트라우마를 겪는 것을 의미하며, 트라우마가 없는 것은 그 단계를 겪지 않았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언어 또한 그런 트라우마를 남기는데요.

언어라는 단계로 들어갈 때 인간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동시에 언어라는 틀로 인해 무언가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언어라는 틀이 없으면 말을 할 수 없지만, 대신 언어라는 틀 때문에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마치 손에 돌도끼를 쥐고 있으면 쥐고 있는 손이 돌도끼를 사용할 때 외에는 부자연스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우리를 완전히 가로지르기 때문에 돌도끼(수단, 도구)처럼 내려놓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문학이 필요해집니다. 이를테면 시(예술)는 언어(기존의 것들 관습, 습관들을)를 고문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언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학을 통해 언어가 왜곡시켰던 기존의 관습들을 의심할 수 있을 뿐이죠. 따라서 어떤 시를 읽었는데 전혀 이해가가지 않는것은 내가 일상적 언어, 사유, 감각만으로 살고 있고 그 너머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도 잘 되지 않는 경험을 자주했던 터라 이 말씀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정신의 장소’

고진이 데카르트를 빌려 이야기하고자 한 ‘정신’은 ‘(습관, 시스템적인 사유)의식의 바깥’, ‘의심하는 것’이었으며, ‘장소'는 ‘사이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장소는 물리적인 어떤 장소를 뜻하지 않습니다. 네덜란드 시장에 있다고 ‘정신의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유(의식)바깥으로 가고자 하는 태도, 외부(사이)에 있고자 하는 태도, 즉 의심하는 정신으로서 존재할 때 우리는 사이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죠. 2부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고진은 내가 이 사이(정신의 공간)를 점유할 수 있는가? 를 계속해서 질문해야 하며, 우리가 ‘정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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