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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다 세미나 6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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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커피 작성일20-03-15 21:55 조회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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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4권 “육체의 고백” 세미나 마지막 날의 후기입니다. 6주로 나누어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한 우리는 책을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야기 하거나, 책의 내용 중 이해가 안가는 것은 서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서로 소감을 나누거나 이야기를 나눈 내용들입니다. 이전에 동정은 육체의 문제로 보았는데, 이제는 동정을 영혼에까지 심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영혼에 심는 것.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래야 주체의 구조화가 들어옵니다. 주체는 영혼의 문제이니까, 주체 외부적 문제로 두면 계속 투쟁해야 하는 문제가 됩니다. 육체와 영혼의 싸움? 그래서 무의지적인 것입니다. 의지의 내부에 있는 무의지적인 것, 그게 영혼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주체의 내부적 구조로 만든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의 의지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주체 안에 또 무의지적 의지가 있습니다. 주체가 두 개로 분리된 것.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육체보다 영혼을 우위에 뒀다면, 이제 영혼 안에서도 또 우위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영혼이 깨끗했으니까, 육체만 벗어나면 되었는데. 영혼 안에 영혼의 구조 안에 자리 잡게 되어 완전히 다른 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다 의지의 문제. 의지가 약해서. “책보다가 졸았어.” 그러면 됐는데, 이제는 육체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의지가 몸을 잡으면 되니. 영혼을 콘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더 죄의식과 밀착됩니다. 그래서 몸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 구조에 그런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죄책감 같은 거. 그래서 정신분석학에 보면, 자아와 초자아, 이드. 영혼의 구조 안에 그런 것을 둔 것이지 않을까. 예전에는 초자아가 내부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왕이나 이런 외부적 요인에 지배를 받았다면, 그런데 이제 내부에 구조화 하는 것에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이상적인 것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의지적인 것과 무의지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걸까요?


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철학이 너무 생리학적 지식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의지적으로 하는 것도 손발도 거의 없지 않을까? 손발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데, 이것을 너무 생리학적인 기본 바탕을 무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은 고백과 고해가 가능해지는 지점이 성으로 이야기되는 거고, 성 자체를 어떻게 해야겠다 보다 성 자체를 둘러싼 담론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것이 이 책의 구도 같습니다. 로마의 원래 종교는 같이 모인 게 없었습니다. 남녀가 같이 있으면서 종교 생활하는 것. 상당히 이교도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독교가 인간을 어쩜 이렇게 수동적인 존재로 머무르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방식에 대해서도 책에서 나옵니다.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닌데, 기독교에는 사이비도 생길 수 있고, 사이비가 사람들을 파워풀하게 장악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다른 것이고 특이한 지점입니다.  푸코에 기반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체와 목자를 연결해보면 기독교가 어떻게 강력하게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목자라면 따라보고 싶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래서 왜 그런 상태가 좋아보였는지를 얘기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이 있다면 왜 좋을 것 같은지. 통치를 당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는 이런 게 불가능해보이기도 하지만.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전수조사 같은 것도 합니다. 치매도 전수조사하고. 통계학이 발달하기도 했고. 예를 들면 세모녀 사건 같은 것이 발생하면 정부 비난한다. 정부가 돌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목자에게 바라는 일. 그 이후의 대안은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기 싫으니까 누구에게 떠넘기는. 이런 것들은 목자가 해결할 일이라고 떠맡기는 것입니다.

 

항상 이 지점에서 목자적인 권력은 자기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목자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내가 양이 되어야 게임이 시작됩니다. 그 지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자의 특성은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도, 정복하는 일도 아닙니다. 지금의 통치하는 방식. 그의 거주지는 그가 돌아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초원을 가로지르고 삶을 찾아다니고.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권력을 행사할 때 위에서 군림하는데, 목자는 앞에서. 이게 회장님과 CEO의 차이 아닐까. 그래서 권력의 본래적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한 번에 법을 제정하는 게 아니라, 가르쳐주는 권력. 그래서 목자는 길을 장악하는 자입니다. 길을 장악하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길을 장악하는 것. 그래서 푸코가 말할 때 계속 절차와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기존 권력과 다르게 절차를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작동합니다. 그게 길. 방법에 의해 작동합니다.


매뉴얼의 시대인 것입니다. 누가 매뉴얼을 만들까. 누가 길을 만들까. 길을 장악해버리는 것이 매뉴얼.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썼습니다. 진리는 누구의 것이든 다 될 수 있는데, 이들이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모르니 내가 그 길을 가르쳐 주겠어. 이때 길은 방법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방법서설은 방법, 풀이법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다 열렸는데, 모든 게 평등해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길을 장악해버린 것입니다. 이게 진짜 무서운 것입니다. 길을 장악해버리는 방식. 이게 권력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자의 권력은 군중과의 본질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영토의 면적. 군주의 숫자. 그냥 왕은 땅이 중요했습니다. 국가는 인구. 그래서 인구, 군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물줄기 같은 것. 그런 것들이 흘러가는 길을 장악하는 것. 이것을 이끄는 자. 군중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가 그려집니다. 이 모든 게 가능해지려면 우리가 군중이 되어야 합니다. 길을 못 찾는 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이런 목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군중을 만들지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습니다. 태국 코끼리 구조 하는 운동가가 하시는 말씀이, 코끼리는 길들이기가 힘든 동물이어서 애기였을 때 아주 가혹한 고통을 줘서 모든 의지를 포기하게 합니다. 먹을 것을 주면서 길들일 수 있는 애들이 아닙니다. 이게 단순하게 강아지가 훈련받는 방식이 아닙니다. 코끼리 구호 운동가가 하는 말이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 그런데 누가 땀을 흘려줄 것인가.” 다 눈물은 흘릴 수 있지만, 땀을 흘리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송파 세모녀 사건 이야기도 나왔지만.


본문에 나와 있는 파렴치함. 목자는 정치가는 아닌 거 아닌가? 기존에 있던 권력이 정치권력이라고 하면, 목자는 행정권력인 것이고, 행정권력이 정치권력이 되었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게 기존에 있던 주권자의 모습과는 굉장히 다릅니다. 주권자가 아닌 겁니다. 혼자 나의 의지에 너희가 복종해라 이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분석체계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여전히 주권자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을 거고.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죄가 아닌 것입니다. 진실 말하기. 하나님의 테스트가 진실을 말했는지 안했는지가 아니고 그 안에 내용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특이했습니다. 그래서 582쪽에 죄인은 진실의 의무를 갖습니다. 기독교는 죄를 다스리는 문제의 중심에 진실 말하기의 문제를 배치했습니다. 지금 사법적 절차에서 핵심적인 것이 이것이 되면 감형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해서 진실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핵심은 “내가 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지의 여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범하자마자 하나님에 대해 진실에 대한 부채가 생깁니다. 그래서 저지른 죄보다 훨씬 무거운 죄.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밀양 같은 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구조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죄를 풀어주는 근본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온 사방에 못된 짓을 해도 고해성사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중적입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장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고백이 내면을 만들었습니다. 내면이 있어서가 아니라, 계속 내면을 형성시키는 것. 그러니까 자기 안에서 다윗처럼 이 일을 하고 나면, 자기가 실제로 외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다 무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기도하고 재판하고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고 그 과정이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그것을 계속하면서 내가 똑같이 외부적으로 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책을 더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저는 세미나를 하지 않았다면,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조금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같습니다. 근영 선생님과 세미나 학인들 덕분에 성의 역사 4권, 육체의 고백 그래도 책도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현대 사회나 그동안 저의 생각들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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