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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유기행 S4] 9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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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無我 작성일19-07-06 15:36 조회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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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유기행 9주차 후기를 맡은 형주입니다.

이번주는 <고르기아스>책의 대망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주를 이룹니다. 칼리클레스는 힘있는 사람이 곧 정의로움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러한자가 누릴수 있는 무절제와 쾌락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몸과 혼을 분리하여 논의를 전개해나갑니다. 몸에서의 요리술과 의술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요리술은 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고, 의술은 몸의 좋음을 지향한다는 것이죠. 이는 혼에서의 즐거움과 좋은 것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좋은것과 즐거운 것은 다르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연습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즐거움만 살피는 행위는 아첨이고, 어떠한 키타라 연주가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까지 언급이 됬습니다. 연극중에 비극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쓰이지요. 연설술이 단순히 시민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첨이라고 합니다. 실제 시민의 혼을 돌보는 연설가는 찾기 힘들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혼을 돌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혼의 짜임새와 질서는 곧 준법과 법이고 이는 정의와 절제와 같다고 합니다. 혼이 무절제하고 부정의 할 때, 욕구로부터 분리해서 훌륭하게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칼리클레스는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어하네요 . 좋은 것을 위한 즐거움은 괜찮다고 합니다.

절제있는 혼이 좋은혼, 무절제한 혼이 나쁜 혼이라고 합니다. 절제있는자는 정의로움을 행하는 자이고 용감한자이고 좋은사람이고 훌륭함을 행하는 자라고 동일시합니다 . 소크라테스는 다시한번 절제있는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즐거운 것 과 고통스러은 것을 피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을 피하는것이라고요. 더 나아가 행복하길 원한다면 대가를 치루고 응징을 받아야한다고까지 하네요. 정의와 절제를 행하도록 목표에 집중하길 원합니다. 욕구의 무절제함을 방치하고 이것을 채우려고 애쓰는 순환은 악이고, 이에 다른사람과 친해지지 못하고 나눌 수 없다고 합니다.

앞에 내용에 대해서, 세미나에서는 무절제를 지양하는 것이 실제 인간의 삶과 괴리가 있다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감정에 빠지면 무절제와 거리가 멀어지는 예가 나왔었습니다. 그리고 절제가 무엇을 막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평형상태를 말하는 것같다고도 하면서 이질감이 든다는 평이 기억나네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더 나쁘기 때문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불의를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치자가 되거나 현정권의 일원이 되어야 겠죠. 하지만 이는 불의를 저지르는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한 불의를 저질렀을 때 대가를 치루지 않다도 되는 위치에 있게 되죠.

조타술의 예를 듭니다. 한 배의 선장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과시하거나 우월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기만 하죠. 승객중에는 좋은사람도 있고 나쁜사람도 있습니다. 단지 모두를 구하는 일을 하는거니까요.

나아가 정치가는 어떻게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청중은 자신이 원하는 말을 정치가로부터 듣고싶어합니다. 하지만 최선의 것, 청중을 훌륭해지게 하기위한 활동은 다소 험난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정치가 본기억이 잘안나네요.

그러면서 칼리클레스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가집니다. 과연 칼리클레스는 누군가를 훌륭하게 만든 경험이 있는가 말이죠. 건축술을 예로 들면서 못하는 사람에게 공적인 일을 추천할 수 없는것처럼요, 이렇게 또 은연중에 비판을 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소크라테스의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고 캐치하는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런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나 논의는 사정없이 격파하는!

앞선 지도자들, 페르클레스, 키온, 밀테아데스, 테이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시민이었나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그들은 후에 시민들이 횡령죄와 사형선고까지 내리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위의 사람들은 시민들의 훌륭한 하인, 일꾼 이었지 그들을 더 낫게 만들고 그들의 욕구에 굴복않고 방향을 바꾸는 일에는 부흥하지 못했다고 평합니다.

마치 공급자, 소매상, 무역상, 제빵사, 요리사와 같은 사람들이 욕구충족이나 시중드는 활동에 관계하고 체육술, 의술을 하는 사람들은 몸의 덕을 위해 분별있게 지식이나 기술들을 조언하는 예를 듭니다. 나랏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혼을 보살피는 사람은 그들의 욕구 충족자가 아니고 절제와 정의를 갖춰야 한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욕구 충족형(?) 정치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이 죽임이나 나라에 의한 처벌을 받으면 부당하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자신이 훌륭하고 훌륭함을 행한 시민들에게 책망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네요. 애초에 자신이 훌륭하다는 전제가 안맞으니까요. 자꾸 현실 세계의 여러 정치인이 생각나는 것은 저만그럴까요?

나아가 불의를 제거하면 당하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합니다. 가정이나 나라의 이로움을 위한 행위는 무슨 보수나 대가를 가지면서 하면 안되는 명예로운 일이라고 하면서요. 이 대목에서 세미나에서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거기에서 돈을 탐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부패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주석에서도 나왔듯이 명예직으로서 국가직을 수행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했었다고 하니, 돈이 개입되면 가치판단의 혼란이 생기기 마련인 것은 지금이나 기원전이나 같은 문제였나 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변호를 합니다. 바로 참된 정치술을 하는 사람이 본인 자신아고, 보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최선을 것을 목적으로 하고,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근거를 들면서요. 그리고 재판에 서는 상황에서도 마땅히 서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의 사형선고를 받은 시점 이후에 쓴 책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투영해서 쓰지않았나 봅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설화를 예를 들며 살아서 받는 재판은 받는 사람의 배경 때문에 판단이 혼미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몸과 혼이 분리되면 비로소 혼의 본성이 뚜렷해 지기 때문에 부정의한 권력자들이 저세상의 재판관앞에서 특히 혼의 무절제와 불균형, 추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 형벌을 받게 된다고 했고요. 그러나 형벌을 받아 유익함을 얻고, 더 나은 자가 되고 타인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불의한 자는 치료 불가능하여 유익함을 얻진 못하지만 형벌을 받아 본보기만은 보일수 있다고 하네요.

아이러니 하게도 대단히 몹쓸자는 힘있는 자 가운데서 나오게되며, 힘있는 자 가운데서 정의롭고 훌륭함을 힘쓰는 자는 대단히 소수이고 대다수는 불의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언급자체가 굉장한 이질감이 생겼다는 분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시대의 민주정에서 균형을 이루는 시기로부터 잠시 승리와 자본에 도취되어 무절제했던 시기를 지나 혼란이 있었던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절제로 귀결되는 플라톤의 논리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연마하고 훌룽한 자로 살고 죽을때도 훌륭한 자로 죽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폴로스와 고르기아스, 칼리클레스가 저승에서도 과연 이익이 되는 삶을 현세에서 사는지 입증할 수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조심하고, 훌륭한 상태로 있도록 주의할것이며, 나빠지면 그에 합당한 응징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정의로워 진다고 정리를 합니다. 아첨은 피해야 하고 그러므로 연설을 할 때는 정의로운 곳에 쓰여야 한다고 다시한번 강조를 합니다. 그리고는 칼리클레스에게 덕을 쌓고 나랏일에 매진을 해야하므로 정의와 덕을 단련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 마무리를 합니다.

시대의 상황에서 부와 권력이 사회를 망가뜨린 전례가 있었고 우리가 도덕이라고 하는 오랜시간 만들어진 생각들은 기존의 정치적인 문제가 대두되어 이를 철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액기스와 같은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당연히 오랜시간 몇천년의 시간이 흐른뒤에 이러한 핵심 도덕적 요소는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정치체계와 화두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혼란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원도 훨씬 전에 쓰인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현 시대와 같은 패턴을 읽을수 있습니다. 다소 고르기아스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 또는 말로만 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한계를 느낀다는 분도 있엇지만 이 책이 철학 입문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에따른 한계가 있다고 평을 해주셨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마지막 10주차로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2. 플라톤주의를 뒤집다(환영들)을 읽고 세미나하는 시간을 가질예정입니다. 다음시간에 어떻게 플라톤주의가 뒤집힐지 궁금한데요,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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