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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학세미나]시몽동 시즌2 - 7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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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달 작성일18-11-04 00:54 조회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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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개체화> - 552-598p 후기


이번에 읽은 부분은 3장의 '개체초월적인 것의 기초들과 집단적 개체화'로 주로 집단적 개체화에 대한 시몽동의 논지를 공부했습니다.


- 사회 그리고 내집단


시몽동은 내집단과 외집단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의 개념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사회는 개인들 간의 접속이나 개인들이 모인 집단을 뜻하는데 반해 시몽동은 이는 사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 통합된 성인이 사회적인 것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인 것은, 그가 스스로를 탄생시킨 개체화의 운동으로부터 단순히 유래한 것만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것을 연장하고 영속시키는 한에서이다.”(554)


즉 시몽동에 따르면 우리가 성인으로서 하나의 개체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며 사회적 개체화를 이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시몽동은 인간의 첫 번째 개체화 이후 정신적 개체화가 시작되면서 그것이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사회적 개체화라고 보고 있지요. 이 사회적 개체화는 일단 정신적 개체화가 일어난 후 그것을 밖으로 확장하고 연장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하며 이때 내집단을 언급합니다.


“사회적인 것은 개체 존재자와 외집단 사이에서 내집단의 매개로 이루어진다.”(555)


내집단이란 단순히 관계의 멀고 가까움이나 자주 만나는 횟수, 혹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 등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요. 각각의 주체가 서로에게 각각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 서로 얼마나 겹쳐지고 그 겹쳐지는 영역에서 각각의 서로 다른 주체들이 어떤 자기 변형을 상대로부터 이루어내는지 그런 것들이 가능한 관계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마주치는 가족이나 자주 보는 세미나 도반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나의 내집단에 속할 수 있고 누군가는 아닐 수도 있겠지요. 이런 면에서 관계의 여러 층위들 중 그 관계가 나에게 주는 강도로서 이해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으로 어떤 관계가 서로에게 위와 같은 변화와 반향을 주지 못한다면 이는 그 관계에선 집단적 개체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이는 그 안에 어떤 내집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지요.


- 집단적 개체화 (모두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나의 내집단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개체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세미나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으로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이미 공감할 수 있는 세미나의 기적과도 같은 말입니다. 즉 어떤 벽돌 책도 세미나를 함께 하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뭘 읽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말을 듣고 뭔가 머릿속에 맴도는 뭔가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뭔가가 결이 맞아 의미가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집단적 개체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집단적 개체화를 통해 혼자였다면 절대 불가능할뿐더러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했다)했을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같은 책들도 보게 되고, ‘분서’ 같은 어마 무시한 책들도 보게 되고(두 번 보진 않겠지만)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즉, 내가 세미나에 참여해서 맺는 관계, 같이 읽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이전에는 없던 ‘집단적 개체화’라는 항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종종 혼수상태가 되거나 (근영샘 없이는) 집단 뇌사 상태에 종종 빠지긴 해도, 그래서 그의 말이 뭔 말인지 잘 몰라도 이 ‘집단적 개체화’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새로운 공통의 경험을 동력으로 이제 40여 페이지의 결론만이 남았다는 (자)부심을 부려 봅니다.


- 노동에 대한 쇼킹한 견해


놀라운 화두가 하나 더 있었지요. 바로 ‘노동’을 바라보는 시몽동의 관점이었습니다.


“노동은 구조인가, 아니면 긴장이고 퍼텐셜인가? 아니면 그것은 자체로는 구조가 아니면서도 구조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통해 세계에 연관되는 어떤 방식인가? (…) 아마도 맑스는 실제적인 역사적 사실을 일반화한 듯하다. 즉 19세기 인간관계에서는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는 양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인간학에 통합하게 해주는 기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노동하는 인간은 이미 생물학적으로 개체화되어 있다. 노동은 자연의 이용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의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종으로서의 인간의 반응, 종적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개체 상호 간의 관계에 그렇게 잘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저항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고유하게 인간적인 두번째 개체화를 산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방비적이다. 개체는 노동 안에서 생물학적 개체로, 단순한 개체로, 이미 주어지고 규정된 개체로 남아 있다. (…) 개체초월적인 것은 마치 개체에서 개체로 가듯 개체 안을 관통한다. 개체적 인격들은 서로 겹쳐짐에 의해 함께 구성되며 집적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노동분업과 연대의 생물학적 결집 속에서처럼 전문화하는 유기조직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570-571)


시몽동은 ‘노동’은 우리 인간이 인간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인간이 이를테면 개미(에겐 미안하지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그 차이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을 합니다. 즉 노동은 인간이 생존을 하기 위해, 생명적 개체화를 하기 위한 정도로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상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만일 개미가 매일 이렇게 열일하는 우리를 보면 자신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같은 개미'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네들이 먹이로 죽은 파리나 곤충을 열심히 운반하고 사냥해야 먹고사는 것처럼 저 종족들은 저 네모난 신용카드라는 걸 먹나보다... 그게 없으면 죽나 보다... 그래서 저렇게 우리처럼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시몽동의 관점에서 노동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사실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의식주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재화를 얻기 위해 꼭 그만큼만 필요한 것 (그런 의미에서 분명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합니다.)인데 언제부턴가 풍선처럼 잉여가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부풀어진 만큼이 모든 사람의 의식주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어버렸지요. 시몽동은 노동이 생명적 개체화의 층위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을 중심에 둔 관계 맺음은 필연적으로 각각이 가진 그 어떤 전개체적 요소도 서로에게 침투하여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노동의 과정에서 필요한 분화와 전문화는 더더욱 각 개체를 모나드화하여 소외를 발생할 수밖에 없겠지요.


멋진 책의 마무리가 다가옵니다.

‘자연학 집단적 개체화’부심으로 400페이지의 하중을 가진 40페이지를 마저 읽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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