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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학 세미나] 시몽동 시즌2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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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삼봉 작성일18-10-03 10:56 조회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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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919일 수요일 자연학 세미나 후기를 맡은 삼봉입니다~

 

지난 자연학 세미나에서는 시몽동의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2부의 1장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다들 뭔가 너무 멋있는데 ...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지요 흐흐흐 저는 389 페이지의 한 생명체의 상태는 풀어야 할 문제와 같다라는 문장에 꽂혔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를 하면서 생명은 결코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무슨 말일까요? ㅎㅎ

 

차이의 생산

먼저 문제라는 것은 차이를 감각과 지각하고 지각하면서 생긴다고 합니다. 시몽동은 감각과 지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각각 감각은 분화, 지각은 통합되는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차이의 생산을 시작으로 그 차이들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 하는 고군분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는 새로운 차원을 찾는 것이 개체화입니다. 문제를 없애버리는 것이 목표가 되면 그 차이를 포기하는 안정적이게 되는 방향으로 가는데 그것은 정확히 생명과 반대방향이지요.

이에 대해서 근영샘이 생명은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같이 살기로 결심한 애들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하게 되는 것의 예로, 남과 여 그리고 음과 양 그리고 오장육부가 있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고, 그렇게 싸우면서도 계속 만나는 것처럼, 문제거리나 긴장상태가 아예 없는 안정화된 상태를 생명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감각이 차이를 수집(또는 생산)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적녹색맹의 예를 들어주셨는데요, 왜 적녹색맹은 적색과 녹색을 두 개다 못 보는 걸까요? 왜 하나의 색만을 못 보는 색맹은 없는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차이’, 감각이 차이를 생산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애초에 적색과 녹색은 그 둘의 차이로 구분을 합니다. 색맹의 경우에 그 차이를 감각하는 것이 부족한 것이지요. 이때 차이를 생산하는 감각과 동시에 지각이 일어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이 감각이라는 것이 우리가 의식하는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감각과 동시에 지각이 일어납니다. (지각과 인식은 다릅니다) 우리의 귀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들었는데요, 우리의 귀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듣고 있습니다. 소음이라든지 말이지요. 그런데 귀가 멀어버리면 치매가 온다고 합니다!! !! 뇌신경한테는 귀가 숨을 쉬는 것이라는 멋진 비유도 덧붙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차이를 계속 수집(감각&지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2. 차이의 적절함, 차이를 감각하는 능력

이렇게 내부에서 지각과 감각이 일어나고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마음의 동요가 일어납니다. 또 아주 적절한 어긋남의 정도로 차이가 존재해야 한다고 시몽동은 말합니다. 아예 너무 달라도 안되고, 너무 같아도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은 이 차이화의 능력, 문제를 문제로 지각하는 능력이 많이 퇴화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너무 동질화된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보니 차이를 감지하거나, 차이로 인한 마음의 동요를 겪는 일이 적은 것이지요. 다양한 것을 겪지 않기에 겹이 적어서 차이의 감각의 힘이 약한 것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적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개체화라는 생명의 작용이 촉발되기가 어렵습니다. 진정한 소통도 어렵고요 그리고 그 극단적인 예가 사이코패스나 게임중독입니다. 사이코패스의 경우는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극단적으로 적은 경우입니다. 얼굴이나 감정의 차이도 읽지 못하고 감정을 느끼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요. 게임의 경우에는 아주 안정된 상태에서 하나의 감각만을 극대화시켜서 쾌락만을 느끼려는 상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질문이 나왔습니다. 차이의 감각은 기를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었는데요, 답은 있다!였습니다. 차이를 감각하고 개체화를 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이므로 약하거나 퇴화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다만 성숙되기 위해서는 많은 마음의 동요를 겪어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겠지요.^^

 

 

3. 야생의 사고, 차이를 아는 신체

저는 개인적으로 청백전 인절미(인류학 절대 미루지 마세요!)조에서 읽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가 이번 시몽동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야생의 사고에서는 원주민들의 사고방식을 구체의 과학이라고 설명합니다. 원주민들이 아주 세세하게 식물, 동물들과 감응하고 이들을 분류해나가는 모습 특히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합하여 우주적 차원의 질서로 통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매우 신체적인 행동으로 느껴졌습니다.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원주민들의 신체가 느껴지다니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서 저 자신의 몸이 참 무능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감각을 믿고서 우주를 관찰하고 상상하고 또 이해하려는, 그 자신감있는 신체에 비해서 제 신체는 의존적입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여행을 가더라도 여행안내서라든지 구글맵이 필요하고, 식당을 선택하기 위해서 리뷰를 읽어보아야합니다.

너무 거친 연결일 수도 있지만, 원주민들의 브리콜라쥬라는 것이 개체화와 연결이 된다고 느껴졌습니다. 브리콜라쥬는 엔지니어와 영딴판입니다. 매뉴얼이나 정해진 도구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독특하게 사용해서 자신만의 브리콜라쥬를 만듭니다. 그때 그것을 만드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손재주꾼은 그 브리콜라쥬로 외부를 향해 이야기를 건내고 있다고 야생의 사고에서는 표현합니다. 원주민 손재주꾼이 브리콜라쥬를 통해서 말을 걸고 있다는 구절이 계속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맴돌고 있습니다. 알 듯 말 듯. 그리고 이 브리콜라쥬가 스스로 차이를 감각하고 지각해서, 자신과 환경이, 자신과 상대방의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는 개체화라는 생명의 본질과 몹시 닮았다고 느낍니다.

 

 

과연 감각을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각의 차이가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일어나는 그 마음의 동요는 어떤 것인지.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읽게 될 시몽동의 책과 세미나에서 이해되기를, 또는 다른 세미나 다른 활동과 이어져서 제 안에서 나름으로 이해되고 실제로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고나면 또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풀기위해서 고군분투하겠지요? 이번 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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