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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5주차 후기- D 권태, 영겁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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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영 작성일18-09-16 11:09 조회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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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우선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책을 읽는 시선의 각도(?)를 약간 조정해야겠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저희의 세미나 후기를 보시고, 근영샘께서 한 가지 조언을 해주신 건데요.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이러이러해서 잘못됐다’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펼쳐지기 전의 세상,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막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의 모습들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다른 세계와 혁명에 대한 욕망 또한 발견했다고 합니다.
 현재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이러이러해서 안 좋다’식의 이야기는 나름 익숙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혁명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영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열망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런 세계’라는 것을 상기하며, 너무 쉽게 변화와 진보에 희망을 거는 우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





 어쨌든 이런 조언을 숙지하고, 저희는 D파트, <권태, 영겁회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부분에는 ‘권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합니다. 권태는 1840년부터 유행한 ‘병명’이기도 하고,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숭배하기도 하고, ‘위대한 행위로 나아가기위한 문턱’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권태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작동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 걸까요?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탈리아 계급은 반복되는 노동때문에, 부르주아들은 반복되는 스펙타클로 인해 권태를 느낍니다. 그러한 권태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소비를 하도록 하는 힘이기에, 자본이 움직이는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태라는 것은 단순한, 지루함의 감정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권태란 안쪽에 극히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비단으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천과 같은 것이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이 천으로 우리를 둘러싼다. 그러면 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문양 속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천에 싸여 잠잠고 있는 사람은 밖에서 볼 때는 잿빛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 꿈꾸었던 것을 이야기할라치면 그의 이야기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권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과연 누가 단번에 시간의 안감을 겉감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겠는가? (...)

[D 2a, 1]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p.333



 권태라는 상태를 표면적으로 보여지고, 또 흔히 얘기되는 ‘지루함’이라는 것으로 모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권태는 반정도 꿈을 꾸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색깔의, 아라베스크 문양의 꿈. 밖에서 보기엔 그게 잿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꿈의 상태는 나를 넘어서는 무의식의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꿈의 상태를, 사람들은 어떻게 다양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실제로 낭만주의는 사회가 반드시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본능을 인간이 간파한 사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체로 그것은 투쟁의 포기를 표명한다. ...... 낭만주의 작가는 ...... 도피와 회피의 시로 방향을 전환한다. 발자크와 보들레르의 시도는 이와 정반대로, 낭만주의자들이 오직 예술적인 차원에서만 만족하고는 포기해버린 염원들을 삶 속에 통합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D 4a,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p.342



 낭만주의는 사람들이 사회가 억압하는 본능을 간파한 상태이지만, 거기서 어떤 변화를 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런 억압이 있다’고 인식할 뿐이고, 낭만주의 예술은 거기에서의 도피처가 되어줄 뿐입니다. 하지만 발자크와 보들레르는 이와 달리, 그러한 인식을 통해 무언가 변화를 꾀합니다. 발자크와 보들레르는 ‘낭만주의자들이 오직 예술적인 차원에서만 만족하고는 포기해버린 염원들을 삶 속에 통합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여기에 권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권태로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은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각종 ‘힐링 서적’을 만들기도 합니다. 분명히 무언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내고 혹은 소비(공감?)하는 것은 권태에서의 일시적 도피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권태로움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행위에 빗대어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권태를 다르게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의 일상, 반복되는 업무라든지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일들, 혹은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도 더 이상 감흥을 주지 않는 소비 등등에서 오는 권태감이, 내가 일상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권태를 느끼기도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이 권태롭다고 느껴야만 거기에서 변화를 꾀해볼 수도 있습니다. 권태가 새로운 일상을 도모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 발자크와 보들레르가 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1840년대에 권태가 유행병처럼 돌았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힘이 모이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을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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