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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제국사>-2부 7-10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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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종범 작성일17-04-23 08:41 조회52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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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넷째 날, 7~10장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목차를 적어보면, 쿠빌라이와 중국의 몽골 왕조, 차가타이 치하의 투르키스탄, 몽골 치하 페르시아, 킵착 칸국 등이 각 장의 주제입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교과서에서는 칭기스칸 이후 몽골 제국이 4개의 칸국으로 나눠졌다고 서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고타이한국, 일한국, 킵차크 한국 그리고 차가타이한국 등으로 말입니다. ‘오고타이한국’에서 오고타이는 책대로라면 칭기스칸의 3남 우구데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마 역자는 우구데이가 원음을 좀더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기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몽골을 몽고(蒙古)로 적고 읽었습니다. 지금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몽고간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몽골 사람들은 자신들이 ‘몽고’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옛 중국인들이 북방의 골칫거리 족속으로 낮춰 부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몽골의 수교가 몽골을 중국의 눈으로 보는 이런 시각을 얼마간 교정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몽골 역사에 대한 통념을 바꿔놓은 일은 이처럼 대칸 이름의 한국식 표기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공동 번역자 중의 한 사람인 김호동 교수는 쿠빌라이 집권 이후 몽골제국이 4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기존의 일부 학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보고 경계합니다. 김호동 교수의 입장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몽골 제국은 칭기스칸 일족이 보유하는 다수의 울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 울루스 상호 간의 역관계가 변하면서 일부 대 울루스 중심으로 제국이 분할 지배되는 양상을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국이 14세기 후반 붕괴될 때까지 ‘울루스 체제’라는 구성적 원리는 견고하게 유지됐으며, 대 울루수의 지배자들이나 그 속의 몽골인들 역시 자신들이 몽골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김호동,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p 142)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서둘러 진도 나가야겠습니다. 쿠빌라이 치하(1260-1294)에서 중국 전역은 처음으로 투르크-몽골 정복자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르네 그루세 말대로라면 앞선 시기 누구도 해니지 못했던 일을 쿠빌라이가 해낸 것입니다. 쿠빌라이의 중국 정복이 갖는 의미는 쿠빌라이 치하 몽골 제국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그루세는 쿠빌라이가 중국 정복과 함께 이미 중국문명에 정복되어 있었으며, 쿠빌라이 자신은 진정한 천자가 되어 몽골 제국을 중국의 제국으로 만드는 데 목표를 두었다고 봅니다(p. 416). 쿠빌라이가 패권을 잡은 뒤에도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쿠빌라이가 칭기스칸의 계승자와 천자 사이에서 이중정책을 취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칭기스칸 일족의 속방에 대해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루세는 쿠빌라이의 중국 정복에 대해 “땅을 정복한 다음 마음까지 정복했으며” 업적 중의 가장 큰 것으로 “역사상 중국 전역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평화를 회복”시킨 사실을 꼽았습니다(p. 427). 


쿠빌라이는 일본, 인도차이나, 자바의 원정길에도 올랐지만, 성적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초원의 전사들이 해양원정전에 익숙하지 못한 탓입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일본 원정은 태풍 때문에 좌절되었습니다. 그루세에 따르면, 이러한 ‘식민’ 원정전은 쿠빌라이와 칭기스칸 다른 세력가가 대칸 자리를 놓고 벌인 승부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카이두와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루세는 카이두를 자기 종족의 옛 전통과 생활방식에 충실한 사람이자 중국화된 몽골인인 쿠빌라이를 견제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301년 카이두의 죽음과 그 아들 차파르의 패배를 끝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쿠빌라이가를 견제하던 우구데이가가 막을 내립니다. 쿠빌라이 왕조, 중국의 몽골 왕조가 다른 몽골 칸국의 유일한 종주가 되는 계기라고 하겠습니다. 


쿠빌라이는 모든 종파를 폭넓게 관용적으로 대했습니다. 도교도들이 불교도에게서 빼앗은 사원들을 돌려주게 하는 등 불교도에 대해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쿠빌라이 시대 불교는 야만인들을 순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들을 굼뜨게 만들어 그들의 자기보존 본능을 죽였다고도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쿠빌라이는 불교에 대한 선호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교를 동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에게 조세를 면제하고 여러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특히 투르크계 웅구트 왕조는 네스토리우스교에 크게 애착을 느꼈고 몽골의 종교적 관용의 한계 내에서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를 잘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12세기 후반 베니스의 상인 가문에 속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만났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남긴 책에서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묘사됩니다. 북부 중국에서 석탄이 채굴되었는가 하면 양자강 하류에서는 운하를 통해 북경으로 쌀을 실어 날랐습니다. 페르시아와도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몽골의 중국 정복에 따라 중국 세계가 유럽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인셈입니다. 13세기 말, 14세기 초 서양의 모험상인들과 선교사들이 대도에 와서 대칸을 만났습니다. 교황과 대칸이 서한을 교환하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4세기 초 항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오도리코는 이 도시에 “한인, 몽골인, 불교도, 네스토리우스 교도, 무슬림 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적은 뒤 “그렇게 많은 인종들이 한 권력의 통제 아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세상의 가장 위대한 경이 가운데 하나”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항주의 평화, 공존 그리고 종교다양성 등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각 종교의 의식적인 노력과 상대 종교에 대한 관용과 존중만으로는 오도리카가 경탄해 마지 않은 종교적 공존의 현장이 만들어지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몽골 제국은 14세기에 몰락합니다. 초원 사냥꾼의 후손으로서 가난으로 단련된 근복과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경위를 잊고 정주생활과 사치의 쾌락에 굴복하였다고 합니다. 쿠빌라이 이후 나약한 2류 황제들의 등장과 함께 칭기스칸 일족은 지나치게 중국화되고 궁정생활과 지나친 주색에 탐닉하면서, 무관심, 유약, 무능으로 일관한 나머지 몽골적 활력을 잃어버렸다고 그루세는 봅니다. 


차가타이는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가 통치한 영역은 몽골령 투르기스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 제국의 중앙부에 해당합니다. 쿠빌라이가나 페르시아 훌레구 가의 통치자들이 자기내 영유지에서 고대 중앙집권적 제국의 전통을 발견하고, 천자나 술탄으로서 지리적·역사적·문화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국가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다면, 차가타이의 통치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중심지 없는 초원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가축과 기병에게는 너무 좁았습니다. 이란화된 투르크인들 사이에도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 광신주의가 자신들의 유목민적 천성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차가카이 칸국은 14세기 중엽 분열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훌레구는 우구데이가를 대체해 몽골의 대칸이 된 뭉케와 쿠빌라이의 동생입니다. 훌레구가 통치한 지역은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구 소비에트 남부, 터키 등지에 해당합니다. 훌레구가 통치하의 페르시아 지역에서는 종교적 요인이 역사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 칸이 어느 종교에 호의적인가에 따라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전개되었습니다. 교리상의 차이나 종교적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앞선 시기 시작된 십자군 전쟁에 따른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증오가 이미 발화력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훌레구는 기독교에 대한 호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도 입장에서 몽골인들은 억압 받은 기독교 국가의 복수자로, 이슬람을 뒤에서 공격하여 그 기초를 흔들어놓기 위해 고비 깊숙한 곳에서 온 신의 구원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킵착과 차이다이 칸국의 칸들과는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훌레구는 시리아 원정도 추진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방기독교도들은 시리아의 무슬림에 대항하여 몽골군과 함께 행군하면서 일종의 성전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토착 기독교도들은 몽골군의 다마스쿠스 입성에 대해 십자가를 받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조직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이 때문에 훌레구가는 킵착 칸들의 적의와 차가다이 칸들의 적의에 직면해야 했고, 시리아 방면으로의 팽창이 저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3세기 말, 14세기 초의 가잔 시기에 이르러 유목민들은 페르시아에서 실질적으로 정주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분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이슬람을 채택한 탓에 보편적 관용을 포기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앞서 훌레구가 치하의 페르시아의 역사에는 종교적 요인이 꽤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요, 그렇다면 통치자들은 어떤 배경에서 특정 종교를 선호하게 되었는가가 관심사가 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훌레구의 경우, 훌레구 자신은 결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자기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종교를 믿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호의적으로 대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종교적 다원주의로 보기보다는, 통치자 자신이 그다지 종교에 경도되지 않은 상탸에서 몽골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 시혜자의 입장에서 편의적 기준에 따라 종교적 관행을 허용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킵착 칸군은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 계열이 지배했습니다. 조치의 아들인 오르다와 바투계가 각각 금장 칸국과 백장 칸국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1251년부터 1255년까지 몽골 세계는 대칸 뭉케와 바투가 추강과 탈라스 강 사이의 초원을 경계로 양분했다고할 수 있습니다. 몽골인들에게 바투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나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매우 잔인한 인물입니다. 또, 15세기말까지 칸은 러시아 왕공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폐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킵착 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계 칸국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 후손들은 중국인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킵착의 칸들은 슬라브, 비잔틴 문화에 정복되거나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한 채 투르크 유목민들의 게송자로 남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킵착 칸들의 이슬람화는 이슬람화는 이란·이집트의 고대문명을 공유하지 못한 채, 마침내 서구세계로부터 자신들을 갈라내 “유럽땅에 천막을 친 결코 동화되지 않을 외국인들”(p. 557)로 만들었습니다. 


* 1차 사료적 성격이 강한 책이라서 가급적 본문 내용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필요한 경우 개인적 생각을 추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지 못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 4월 26일(수)에는 11장 티무르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 기행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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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문리스님의 댓글

문리스 작성일

와우와우! 멋진 후기입니다. 잘 읽었어요. 세미나 빠진 학습 부진아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후기! 신샘 감사요!^^

기범님의 댓글

기범 작성일

와우~ 종범쌤,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셨는데, 그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후기를 써주시다니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