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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해진 사랑, 그 뒤에 피어난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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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작성일22-07-29 18:01 조회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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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해진 사랑, 그 뒤에 피어난 수치심


한태림 (청공자, 1학년)



이토록 간절한 사랑이라니

평온한 베어 하우스, 노래방 감성의 투박함을 장착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나의 애창곡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 이었다. 촌스럽지만 오래된 노래에 담긴 특유의 순수한 가사가 좋았다. ‘세상이 포기한 너지만 난 그런 너를 영원히 사랑할게.’ 가사의 주된 내용이다. 이토록 절절한 사랑이라니. 상대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크기에 ‘세상’마저 버리고 그 사람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 평생에 거쳐 그런 사랑을 한 번만 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가사를 곱씹을수록 문득 어디서 많이 보았던 형태의 사랑임을 느꼈다. 그러다가 책장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래 맞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 안나와 브론스키 그 자체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노래와 소설의 사랑은 각자가 그 분위기를 다르게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안나는 그녀의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 브론스키와의 불륜을 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이루었음에도 행복은커녕 수치심에 몸부림친다. 세상을 포기할 만큼 브론스키를 사랑한 그녀는 왜 행복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수치심에 몸부림쳤을까?



안나에게 옮겨붙은 불씨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의 안나는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여자였다. 기차역에서 오빠를 끌어당기는 안나의 동작 속에는 대담하고 우아한 생명의 활기가 동시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휘어잡는 그녀 특유의 매력을 주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불륜을 저지른 오빠가 안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한 배경으로도 이러한 사실은 짐작 가능하다. 그는 안나가 자신의 아내인 돌리의 마음을 그에게로 다시 돌려세워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안나를 모스크바로 불러낸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힘으로 오빠네 집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해결한다. 그러나 오빠가 겪은 불륜으로 피어난 문제의 불씨는 곧바로 그녀에게 옮겨 붙는다. 재미없는 남편과 따분한 인생을 살던 그녀에게 매력적인 젊은 장교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기차역에서 틔운 브론스키와의 불씨는 무도회장에서 서로의 눈빛에 의해 발각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눈빛은 브론스키를 밀어내면서도 그에게 사랑을 말한다. 그녀의 눈빛에서 확신을 얻은 브론스키는 안나를 따라 기관차에 올랐다.




그의 시선에 포획된 안나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큰 죄를 저질렀음을 느꼈다. (중략)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삶에 브론스키 말고는 아무도 없으므로, 그를 향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한 것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그녀는 육체적인 굴욕이 느껴져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나카레니나1권』_레프톨스토이_민음사_326쪽


결국 그들은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브론스키와 정사를 나눈 뒤, 안나는 엄습해오는 수치감에 직면한다. 그녀는 이제 그의 앞에서 고고한 귀부인으로 비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론스키 앞에서 그녀의 역할과 신분이 반영된 드레스가 벗겨진다. 그녀의 알몸에는 동물적 본능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옷을 벗고 나누는 정사는 마치 여신처럼 느껴지는 존재마저도 인간이라는 동물로 내려오게 만든다. 즉, 이것은 도무지 하나의 동물 종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귀부인이 브론스키와 같은 욕망을 공유하는 인간이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때문에 벗겨진 그녀의 육체는 이전에 브론스키에게 보여 주었던 그녀의 모습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지금의 모습은 오히려 그전에 보여주었던 그녀의 매력에 이질감을 준다. 귀부인도 한 낯 인간일 뿐이라는 짐짓 예상만 하고 있었던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브론스키의 시선 속에 안나가 갇힌다. 그녀는 그에게서 동물적인 존재로 격하되었음을 느낀다. 마치 브론스키에게 한 마리의 사냥감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굴욕감을 느끼는 그녀가 애처롭다. 붙잡힌 사냥감의 목숨은 오직 사냥꾼에게 달려있다. 따분했던 귀부인의 삶을 벗어던진 그녀가 브론스키에게 붙잡힌다. 그녀의 죄는 그에게 붙잡힌 죄다. 그러므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에게 빈다.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숨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빈다. 귀부인이라는 인간보다 한 차원 낮은 존재가 된 그녀의 삶에는 오직 브론스키의 사랑만이 남았다.



밀실로 축소된 안나의 세상

무도회에서 소박을 맞은 그녀는 브론스키와 함께 시골로 도망친다. 남들 속에서 비공식적인 불륜 관계를 이어갔더라면 안나는 그와 떠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낭만주의라는 허위를 감싸고 공공연하게 불륜을 일삼는 다른 귀족들처럼 앞뒤가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한다. 안나는 거짓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둘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 또한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너무나 맑아서 눈빛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녀는 사랑의 도피로 떠난 시골에서도 혹시나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안나와의 시골 행을 선택한 사람이다. 때문에 안나는 그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한 그가 후회하지 않도록 안나는 여러 책들을 읽고 자신의 매력이 죽지 않았음을 그의 친구들을 통해 어필한다. 하지만 모든 행동은 브론스키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위한 목적에 그친다.


브론스키가 선거하러 가기 전, 그가 떠날 때마다 그들 사이에 되풀이 되는 소동이 그의 마음을 냉담하게 할뿐 그의 마음을 묶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안나는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을 침착하게 견디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꾹 참기로 결심했다.

『안나카레니나3권』_레프톨스토이_민음사_243쪽


그녀가 보기에 자신과 반대로 브론스키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할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밖에서 저지르는 모든 활동은 새로운 사랑을 위한 발판처럼 보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온 정신이 그를 향해 집중되어 있는데 브론스키는 그렇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명예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 젊은 장교라는 나쁘지 않은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 안나를 위해 함께 시골로 왔다지만 언제든 삶을 새로운 형태로 변주할 수 있다. 남자로서의 매력, 여성에 대한 의리는 사회에서 높은 가치로 매겨질 테니 말이다.


반면 그녀의 삶은 그의 사랑 말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귀족사회에서 그녀는 욕망에 눈먼 한 마리의 암컷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 속에 그녀의 사랑은 국소적인 부분일 뿐이다. 그가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을 부정한들 소용없다. 비대칭적인 둘의 처지가 그녀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끝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잠재적인 불신과 불안을 결코 재울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브론스키가 떠난다면 정말로 볼품없는 여성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남편과 아들마저 버리고 택한 브론스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인생의 전부를 상실해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니 다른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여전한 가능성을 가진 그가 집밖을 나가는 것이 그녀는 미치도록 불안하다. 그리고 그녀는 둘 사이에 처해진 엇갈린 운명이 분하고 수치스럽다.


그러나 브론스키는 온통 자신으로 가득 찬 그녀의 사랑이 집착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집착과 불안이 일으킨 안나의 추궁과 다툼은 그녀에게서 그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를 붙잡을수록 자신에게서 멀어짐을 알게 된 안나는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딘다. 브론스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밀실 속에서 불안에 떨며 다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마치 주인이 없으면 밖을 나갈 수 없는 강아지처럼 그녀는 그가 떠난 집을 지키는 일 밖에 할 수가 없다.



난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

『안나카레니나3권』_레프톨스토이_민음사_455쪽



그를 잡아둘 수 없다면, 그럼에도 그를 향한 집착은 커져만 간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나만 당할 순 없다. 죽어서 그도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자’ 브론스키로 인해 떠안게 된 죄책감이다. 그로 인해 참고 참으며 고통스럽게 갇혀 지내왔다. 이제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마저 동물원에 사로잡힌 짐승처럼 자신을 보는 것 같다. 그녀의 헐벗은 육체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처럼! 안나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느낀다. 그런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다. 복수심과 수치심이 뒤엉킨다. 그렇게 그녀는 무서운 기세로 폭주하듯 생각을 해치우고서 달리는 기관차에 몸을 던진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랑이라니

다시 노랫말을 재생해 보았다. 브론스키를 대입하니 가사 속의 건방진 심리가 살짝 엿보인다. ‘세상도 버린 널 사랑할게’라니.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포획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랑의 ‘선언’은 다른 선택도 가능한 위치에 있어야 할 수 있다. 노래 ‘금지된 사랑’은 여전히 다른 사랑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쥐고서 상대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해 버린 브론스키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여태껏 선율에 빠져있던 탓에 이기적이고 오만한 마음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했다.


나는 내심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비대해진 상대를 향한 마음이 절절하다면서, 나만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바람은 상대의 빈곤한 삶도 함께 바라는 것 이었다. 삶의 내용이 무미건조한 인간만이 하나의 인간만을 중심에 둘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안나의 삶이 따분하지 않았다면 브론스키라는 남자 하나에 그렇게나 매달렸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길 바란다는 것은 그가 사랑으로 인해 집착과 불안에 떨게 되기를, 마침내 그것을 증오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 마음은 얼마나 모순된 폭력인가.


(2022. 07. 23. / 청공자 1학년 2학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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