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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씨네] 푸지에_by 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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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피지기 작성일18-10-05 15:05 조회1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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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지에 #안녕



 오래전.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단편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않다>의 한 대목. 혁명이 끝난후(?) 대략 60여년간 정부로부터 올 연금 소식을 기다리며 늙고 지치고 굶어죽어가는 대령과 대령 부인. 일요일아침이었던가, 대령의 부인은 마을에 예정된 장례식을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건 우리 마을에 OO년에 있는 자연사예요."(기억에 대충 이랬다. 워딩은 정확치않다)

 그땐 그냥 저 '자연사'란 말이 낯설어서 밑줄을 그었더랬다. 환상적인 대화들이 숨막히게 아름다웠던 소설이었으니깐.

얼마전. 부터 유목 사회의 시공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또한번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그 자연/초자연의 세계에선 자연사로 죽는것은 '치욕'(정확히 이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도의 느낌...)이라고. 삶은 당연히(!) 전쟁과 사건/사고 등에 의해 돌연한 죽음을 맞는 것이라는, 대단히 경험적이고 그래서 합리적인 인식. 헐? 객사를 허하라?여하튼 자연사로 죽는다는게 당연히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 만으로도 묘하게 가슴 뛰던 기억. 생각해보니 그럴법했겠다는 이해도 갔던.

 오늘. 유목 세미나 회원들과 연구실 식구들과 몽골 <푸지에>라는 다큐를 함께 보았다. 분명 누군가 시나리오나 소설로 쓴 작품의 극이었다면, 푸지에와 등장인물들이 배우였다면, 삼류 작가 삼류 연출가 소리를 들었을 게 뻔한 이야기. 허나 정작 정수리를 도끼로 찍힌 듯한 이 비명조차 쉽지않았던 어떤 섬광은 이것이 실화이고 다큐였기에 가능했고,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에 반대로 우리가 리얼하다고 믿는 이 삶의 '허구성/환상성'들을 거꾸로 세워버릴 수 있었을 터. 그런점에서 <푸지에>는 한 몽골 소녀를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기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다큐였다. 그러고보면 평안한 중산층적 삶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야말로 얼마나 삼류인가. 비현실성은 고사하고, 그것이 삶이기나 한 것일까. 


 말 39마리를 도둑 맞은 상태에서 자신들을 찾아온 낯선 이방의 다큐 출연자에게 말을 선물로 내어주던 32세의 몽골 여인 푸지에 엄마, 여섯살 나이로 아침마다 가축들을 풀어 놓고 씩씩하게 말 위에서 초원을 누비던 푸지에. 다큐 출연자가 겨울을 나기위해 방목장을 이동한 이들 가족을 떠나 몽골 사막을 횡단하고 돌아왔을 때(불과 몇개월만이었다) 푸지에의 엄마는 낙마사고에 이은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후였다. 수년후 다큐 출연자가 아프리가 여행을 마치고 다시 몽골을 찾았을 때 12세의 푸지에는 초등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상태였다. 

 이것도 삶인가. 아니 이것이야 말로 삶인 건 아닐까.

 안녕(安寕)하시라,는 이 말이 한동안은 새삼 목구멍에서 까끌거릴 것 같은...인천가는 지하철에 앉아 나는 엄마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던 푸지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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