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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유기 오픈 세미나 에세이 발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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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하 작성일17-10-01 23:47 조회1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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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유기 오픈 세미나의 마지막 – 3학기 에세이 시간!

3학기 ‘요괴퇴치’ 세미나는 지난 학기들과 달리 오픈 세미나로 진행되었는데요,

때문에 지난 에세이 발표와 다르게, 무려 다섯 명이 에세이 발표를 했습니다.

오픈 요괴퇴치 세미나에서는 8주동안 <달라이 라마, 마음이 뇌에게 묻다>, <몸에 갇힌 사람들>,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 <마담 보바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에세이에 등장한 건 역시 끝에서 두 번째에 읽은 <마담 보바리>와, 맨 마지막에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세이는 ‘보바리’조와 ‘아이히만’조로 나뉘어 발표했습니다.

코멘트는 근영샘과 철현샘, 사진을 찍어주신 줄자 샘이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먼저 보바리 조의 관희샘은 ‘엠마의 죄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어디까지 엠마 보바리에게 ‘죄’를 물을 수 있고, 어디까지 그녀가 다른 삶을 산 것이라고 봐야하는가 하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죄목은 직무유기 및 태만이었지요.ㅎㅎ

그러나 만약에 엠마가 내 옆에 있는, 실제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희샘이 그녀를 가까이에서 구체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업 운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전반적인 글에 대한 코멘트는, 글에 ‘엠마 보바리’라는 사람이 없고, 관희샘 자신이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는지만 나와 있다-였습니다. 엠마가 어떤 맥락, 흐름에 있는지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놓고 써야 <마담 보바리>라는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만날 수가 있다는 코멘트였지요. 그것이 아니라면 작가 플로베르가 죄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일지, 그가 보바리를 가지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지, 그가 가진 시선을 따라가 보는 것이 <마담 보바리>를 만나는 것!

또 관희샘은 비문과 오타를 지적받으셨는데요. 글의 비문과 오타, 문단의 길이 같은 것이 사소한 형식이 아니라 내 사유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합니다. 글에 비문이 많은 것은 사유가 비문적으로 진행된다는 말이죠!





지원샘은 보바리가 환상에 빠져 자살까지 이르는 것을 보고, 환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질문이 생긴 것으로 에세이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엠마가 가진 환상의 원인을 노동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권태’라고 보았고, 그밖의 다른 인물들도 다른 여러 원인들에서 비롯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썼는데요. 환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질문의 결론은 잘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환상’은 무엇인지 또 ‘권태’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단어만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환상과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생계형 노동이 없으면 무조건 권태로워 지는 건지 등의 더 세밀한 질문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권태에 대한 인용문에서 ‘배울 것이 없고 아무것도 느낄 것이 없다’ 라는 부분을 가지고 더 파고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코멘트도 나왔습니다.

지원샘이 노동자와 비교해 부르주아 계층을 가지고 환상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적절했다는 코멘트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플로베르가 이전에 없던 부르주아라는 것의 탄생을, 새로운 욕망의 탄생을 포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환상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욕망의 특성이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보면 좋았겠다는, 그렇지 않으면 노동해야한다! 라는 이야기만 남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2조, 아이히만조는 다들 비슷한 부분을 봤는데 그래도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윤하는 아이히만을 깊게 보지 못했다는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아이히만과 자신의 공통점을 주로 이야기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신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부분까지만 얘기가 됐습니다.

아이히만을 조금 더 집중해서 깊게 봤으면 자기 자신을 직접 볼 때는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무사유를 ‘어쩔 수 없었다’라는 듯이 표현해서 우려스럽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사유하지 않음’은 엄청난 의지를 가진 행위인 건데, 이것을 ‘아무 의지 없이, 의도 없이’등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도 그렇게 생각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렌트가 말한 어리석음과 무사유의 차이점을 좀 더 생각해봤다면 그 지점을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리석음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인 반면, 무사유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적극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몰랐어요”라는 말로 그의 죄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은정샘은 일단 좋은 질문을 잡았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이란 뭐지?” “아렌트가 말하는, 논리적 추론과 합리성이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라는 게 대체 어떤걸까?” 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정확하게 풀어내지는 못했는데요, 생각이 명확히 정리가 되지 않아 문단이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대답하는 과정에서 은정샘은 엄청난 수확을 얻어가셨습니다! 바로 이제까지 “나는 타인의 입장을 수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거기에 불편함도 있다. 내 생각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라고 말을 하던 것이, 사실은 타인과 함께하는 장 위에 쉽게 올라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타인과 무언가를 함께하는 순간, 합리적으로 타인의 관점을 사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죠.

어떤 일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데 거기에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어 그 장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을 때, 오히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양보한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은정샘은 매우 당황하셨지만 ㅎㅎ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질문과 대화를 해보며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잘 생각해볼 주제로 받아들이신 것 같았습니다.



저(석영)는 윤하와는 반대로, 아이히만을 너무 악으로 그렸다는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나에게 두려움이나 욕심 등의 마음이 올라올 때, 그것을 순간적으로 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실제로 그렇게 해버리는 게 ‘무사유’이며 그것 자체가 악입니다.

그런데 저는 <악을 숨기는 무사유>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무사유 이전에 절대적인 악이라는 게 있고, 무사유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그려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히만의 출세욕, 출세지향성이 무사유의 원인이라고 꼽았습니다. 이런 건 사실 욕망을 재단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인정받고 출세하고 싶은 건 당연합니다. 문제는 ‘어떻게’인데 저는 욕망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나쁜 것’이라고 쓰게 되면 글이 너무 쉬워지고, 세상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무사유’라는 악을 범하지 않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9주 동안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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